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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원 Jun 18. 2020

결혼 기념일 43년 차

카드와 꽃 다발 대신 카톡 사진 한 장

북쪽 총각과 남쪽 처녀? 이들은 명동 대연각빌딩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이었다. 신랑이 함 팔고서 동네 사진관에서 찰칵. 


가을빛이 단풍을 발갛게 물들이던 그 날은 10월 24일 유엔의 날로 국경일이었으니 바쁠 일이 있을 턱이 없어 점심때가 다 되도록 나는 늘어지게 자고 있다.

내 꼴을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 기세가 대단하시다.

“선보러 갈 놈이 잠만 자냐?”

“아버지, 무슨 선이에요. 안 보렵니다. 여자가 스물일곱 살이라는데.”

“이 녀석아, 네 나이가 서른이야, 서른!”

검은색 양복에다 조끼까지 껴입고, 잠이 덜 깬 얼굴 그대로 수염은 꺼칠하니 도살장 가는 소 꼴로 끌려간 곳이 미아 삼거리 복다방이었다.

(복다방? 서울 복판 이름 좋고 시설 좋은 찻집을 두고……. 이 변두리까지)

심훈의 <상록수> 여주인공을 좋아하든 아버지는 당신의 틀에다 아들의 색싯감을 맞추는 일이 이번에도 여전하시니 한낮의 악몽이었다.


그동안 맞선으로 한 번은 복슬복슬 아가씨, 한 번은 결혼 약속한 애인이 있으나 애인과 싸우고 홧김에 왔던 은행 아가씨(그러고는 나중에는 그 남자와 결혼했다), 한 번은 산 좋고 물 좋은 영덕까지 가서 만났던 아가씨(영화를 보는 동안 더울까봐 부채질해주던 착한 시골 처녀)를 만났다.


내가 당하기도 하고 내가 싫다고도 했더니 지치고 피곤했다. 이번에는 복다방이라고? 명동의 ?몽셀통통이나 호텔 다방은 뒀다 뭐 한데?

시간은 자꾸 가면서 안절부절못하던 참에 중매쟁이가 나타나는데, 아버지 친구의 따님이다.


오래전에 아버지는 그 따님을 며느릿감으로 점찍었는데, 그만 다른 누구에게 눈 맞아 시집 가버리고, 이번에는 친구를 소개합네 하고 나섰다.

중매쟁이의 뒤를 따라 나타나는 노인이 계셨는데, 선을 볼 주인공의 아버지가 되심 직하다. 또 누군가가 나타나서 보니, 설마, 설마! 아니, 그 설마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바로 너, 너야!

어찌 이런 일이.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의 나는 일기를 줄 곳 써왔고 일기장에는 어쩌다가 내게 올 내 색시의 모습을 가볍게 스케치를 했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내 앞에 있다니.


놀라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면도 안 한 턱수염과 물만 대강대강 칠한 새 둥지 머리의 내 꼬락서니가 깔끔하게 단장한 그네의 완벽한 자세에 마주하니 한심하고 소름이 다 끼칠 정도로 미안하고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맞선 볼 때 늘 그렇듯 가족들은 웅얼웅얼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았다. 내가 이 말 저 말 하다 보니, 이런 세상에! 두 사람은 회사는 다르지만, 충무로의 같은 빌딩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는 3층이고, 그네는 8층이다. 어떻게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도 못 만났을까?


나는 3층이라 걸어 다녀야 하나, 그네는 엘리베이터를 타니 매일 스쳤어도 무심하게 지나치다가 여기서 만나다니.

할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중매쟁이 친구의 집이 이 근처라서 가까운 다방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등.

회사가 있는 대연각 빌딩 뒷문에 있는 오징어 집의 맛이 먹을 만하다는 등 옆에 있는 팜파스 다방이 단골이라는 등.


상대는 조용하고 나만 시끄럽다. 다른 맞선 때는 커피 한잔하고 떠나보내려고 골똘했는데, 이번엔 어떻게 하면 함께 더 있을까 하는 궁리뿐이다.

면목동에서 <샘터>라는 경양식 집을 하는 친구가 있다. 주머니가 비어도 외상이 되니, 함께 가자고 하니 마다하지 않았다.


친구는 반가워하고, 음악을 우리 취향대로 팍팍 틀어주었다.

평판플래터스(Platters) 의 온리유(Only you)가 내 마음인 척, 그러다가 폴 앵커(Paul Anka)의폴앙카(Paul Anka)의 유아 많이유아마이 테스트 시(You데스트니(You are my destiny /당신은 나의 운명)에 공연히 심각한 체한다.


밤은 깊어 가고, 통금시간이 걱정이다.

그때는 통금이 있을 때였으니까.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며 슬쩍 손을 잡았다.

가만히 있다. 내게 맘이 있구나. 자신이 딱 선다.

시작은 쉬웠어도 그 뒤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날 내게 손을 잡혀도 빼지 않았던 것은 내가 쑥스러워할까 애써 참아 낸 그네의 착한 마음이었지. 나의 박력에 홀린 것이 전혀 아니었다고 했다.

머리는 까치둥지요, 눈은 캥 하지요, 볼은 패였지요. 사실 그때 내게는 볼 게 없더란다.

나중에 그 말을 들으니 충격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니 내가 무슨 항의를 할 수 없다.

그네는 이 사람을 택하여야 하나하고 갈등이 생기더라고 했다. 그네는 그날 나와 헤어진 뒤, 맞선을 세 번이나 더 보았다니.

나도 두 번을 더 보았다고 없던 일이었지만 지기 싫어 맞불을 놓았다.


여러 번을 더 만나고 마지막이라고 만나던 날, 내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여 그네의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그네에게 선택! 받아 맞선 본 지 여섯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접살림을 남가좌동 명지대학교 앞 문간방에 차렸다.


새벽잠이 깨면, 한 여인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도록 행복했다. 이토록 고운 색시가 어떻게 내게 왔을까.

출근길에 아내가 챙겨주는 도시락을 들고, 용돈 500원을 받아들고 나서면 걸음이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500원이면 담배 한 갑과 커피 한 잔 값이었다.

한여름 문간방 부엌문을 꼭 잠그고 서로 물 뿌려주며 등 밀어주고, 끼니 끓일 때 석유풍로의 연기가 매워도 즐거웠고 16인치 흑백 TV의 사치가 호사스러웠다.


결혼 10년째 되든 해.

12월에서 다음 해 2월까지 아내는 봉급만 가지고 살기 어려워 재봉틀이라도 돌려보겠다며 고덕동의 기술학교에서 홈 패션을 배웠다.

아내가 부업을 생각하는 마음이 반갑고 미안했다.

밤 9시가 넘어 수업이 끝나면 아내는 아파트 사이의 어둡고 좁은 길을 따라 집으로 온다. 나는 아내가 올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동동 떨며 기다렸다.


아내가 나오면 추위에 약한 아내의 손을 내 손에 감싸 비벼주곤 했다. 맞선 볼 때 생각이 났다.

바람이 심하게 불기도 했고 눈이 퍼붓듯 오던 날이 있었다. 연수원 일을 이야기하며 아내는 어찌나 명랑했던지.

3달 과정의 교육이 끝나 가고 있었고, 이틀만 있으면 자격증 시험을 볼 참이었다.


바로 다음 다음날 공부를 한 보람 없이 아내는 교통사고로 거의 9달 동안을 병원에서 누워 보냈다. 시어머니가 

" 내가 몸이 아프니 얼른 오너라. "

하는 말에 택시를 타고 아내는 명일동에서 잠실동으로 갔다. 가다가 맘 좋은 아내는 운전기사가

"탑승 한 분 시킬게요. "

하는 말에 어쩌냐. 승락했지.  송파 네거리에거 직진 신호를 받고 가던 아내를 태운 택시가 성남방향에서 잠실 롯데로 가는 신호 위반 차량과 접촉 사고가 났다. 택시 기사는 차량 밖으로 몸이 날라가서 바로 사망, 아내는 전신 마비 아니면 바로 사망한다고 했다. 가해 차량은 눈 멀뚱하니 1주일 만에 퇴원했다. 

나는 병실 안 아내 병상 옆 의자에서 함께 보냈다. 아침에 라면 하나 끓여 먹고, 간병인에게 아내를 맡기고 출근한다. 퇴근해서 나는 아내를 지킨다. 아내 대소변을 내가 맡아 친다.

이제 아내는 목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한 손 한 발을 못 쓰며 몸의 근육이 굳어 아프건만 남편이라고는 생각날 때만 굳은살을 만져주거나 무슨 날에 장미꽃 몇 송이로 아픔을 지워주려 하지만, 아내 자신은 장미꽃보다 더 밝다.


장미여! 너는 가시라도 있지만 내 아내는 향기만 있구나!

흑단 같던 머리칼 사이사이에 흰머리가 자욱하게 솟아나니 내 무릎에 머리를 뉘고 집게로 하나씩 뽑노라면 세월이 한꺼번에 다가온 듯한 놀람과 이제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 더 살까 하는 아득한 기분이다.

이제 살아온 세월의 고통보다 다가올 고통이 어떻다손 쳐도 내가 아내의 다리가 되고, 손이 되는 세월을 살 참이다.


한 사내의 아내로서 생사의 갈림을 굳센 정신력으로 버틴 아내에게 나는 겉으로 침묵하여도 나의 진정은 아직껏 입 밖에 못 해본 당신이라는 말과 함께.

아내는 내가 곁에 있어야 생활한다. 2급 장애자 처지다.

"당신은 내 빛이요, 당신의 그림자 되고, 당신의 영혼이 되고 싶소."

나는 해마다 카드 한 장에 장미 꽃 다발을 아내에게 넘기면 꼭

"나는 현금이 더 좋아."

진담이 아니라 농담이겠지. 

그러다가 이젠 카드와 장미 꽃 다발도 시들하다.

오늘 아침에 나는 카톡으로 카드 한 장을 보낸다.

결혼 43년, 처음처럼. 누가 누구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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