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꼴의 고리를 끊다.
우리는 시골 변두리 다방에서 웃음을 파는 여종업들을 성만 따라 '미스김', '미스박' 등으로 부른다. 그들은 이름조차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어쩌면 보통 사람에게 요구되는 존중의 의미는 없이 그저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백상아라는 엄연한 자기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쓰백이라 불리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유일한 가족인 엄마에게 버림받아 보육원에 맡겨지고 냉랭한 사회의 시선으로 인해 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해 결국 살인 미수자의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한다. 어두운 과거의 트라우마가 그녀를 지배해 이름조차 당당히 밝히지 못해 겨우 악으로 버터며 살아가는 미쓰백이다.
어느 날 그녀의 눈에 들어온 지은이는 자신의 어린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서 괴롭기만 하다. '난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될 수 없어'라는 외마디 변명은 자신과 닮은 지은이를 외면할 좋은 구실이었다. 강아지 한 마리조차 지 손으로 키워 본 적이 없는 미쓰백에게 지은이는 절대 거둘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두 닮은 꼴은 오히려 닮았기 때문에 공감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외면할 수 없었으며 서로 지켜주는 존재가 되어간다.
' 이런 나라도 함께 갈래?'
미쓰백의 마지막 대사는 완벽하지 않지만 아이를 향한 따스한 구원의 손길이다.
이 영화는 아동학대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실존 인물을 콕 집어 표현할 경우 2차 피해자가 생길 것을 염두해 이 세상에 숨겨진, 학대받는 아이들을 찾은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감독은 전한다. 한국 정서상 훈육은 이웃이 참견할 바가 못 되는 것이라 볼 때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는 아동학대의 피해자는 통계상 수치 보다도 훨씬 웃도는 것이라 짐작된다. 감독은 그것을 알리고 싶었으리라.
부모의 구타로 온몸이 멍투성이에 성한 구석이 없고 마음조차 갈기갈기 찢긴 지은이를 과연 미쓰백은 거둘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강아지 한 마리조차 직접 키워 본 적이 없는 미쓰백이 말이다. 감금되어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아이의 모습과 온실 속 화초처럼 애지중지 사랑받으며 자라는 애완견의 모습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식을 키우는 개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아이 아빠의 울부짖음, 즉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저 애 인생괴 제대로 되겠어요?'라는 말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미쓰백의 가슴에 꽂히어 양심을 뒤흔든다. 결국 단 몇 일간만의 엄마 역할만 허용할 뿐, 영원한 엄마로서 역할은 포기한다. 어린 시절에 이성을 잃을 정도로 만취해 미쓰백을 구타하던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보육원에 맡겼듯이 그녀도 자신으로 인해 반복될지 모르는 아동학대의 가능성을 피해 그 고리를 끊어 지은이를 살리고 싶었을리라. 준비되지 않은 보모는 스스로에게나 아이에게나 불행만 자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임중독자인 아버지, 베란다, 화장실에 아이를 가두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밧줄루 온몸을 칭칭 감아놓고 온갖 폭력과 폭언을 일삼던 계모, 아이의 존재는 지원금을 타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던 그들의 모습은 의심없는 자격미달의 부모이다. 아마도 미쓰백은 그들처럼 이 아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는 자신도 매한가지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학대의 두려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어린 배우의 세심한 연기에 가슴이 찡해 온다. 도와달라, 살라달라는 말 한마디 못할 극도의 두려움에 잡은 두 손가락조차 생명줄처럼 놓지 않으려는 아이의 간절한 눈빛은 미쓰백뿐만 아니라 보는 모든 이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만 그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해 모른 척 외면할 뿐이었다.
이 가을날 부모라면 그 심정을 다 알법한 가슴 먹먹한 영화에 눈시울이 뜨거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