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회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
30대 초반에 하프 마라톤에 도전한 적이 있다. 다이어트 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마라톤 대회를 목표로 하면, 좀 더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아 덜컥 신청해버렸다. 처음엔 500m도 달리지 못하겠더니, 매일 저녁 집 근처 공원을 달리면서 이내 10km 정도는 뛸 수 있게 되었다. 매일 퇴근 후 10km를 달리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무리하지 않으면, 20km는 달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대회에 나가 달려보니 예상과 달랐다. 속도를 조금 낮춰서 달리니 숨찬 것은 조절이 가능했다. 그런데 13km 정도를 넘어가면서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단기간의 연습으로 단련된 내 다리 근육은 10km용이었던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체력이 떨어지니 정신도 혼미해졌다.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 한 번도 쉬지 않고 남은 7km를 달렸다. 간신히 잠실 종합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 400m만 돌면 되는데, 그 400m가 너무 아득하고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걸음도 옮기기 힘들 만큼 몸이 무거웠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뭐지? 이게 뭐지? 뜨거운 무엇이 몸 안으로부터 확 올라오면서 숨도 가쁘지 않고, 몸과 다리도 공중에 뜬 것처럼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남은 거리를 힘차게 달려 2시간 7분여 만에 21.0975km의 대장정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그 이후 잘 느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운동선수가 시합을 마친 후, 오디션에 나선 무명의 가수가 노래를 부른 후 퇴장하면서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공의 기쁨에 감격해서도 아닌, 실패의 슬픔에 겨워서도 아닌 눈물. 자신의 온몸을 던져, 모든 것을 바쳐 최선을 다한 이에게 찾아오는 그것에 대해.
이 광고를 보면 그때의 감정이 다시 마음 한구석에 솟아오른다.
출처: https://www.yamamoto-mrc.co.jp/blog_old/sb2/?p=7202
95회 일본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 중계 광고다. 흔히 甲子園(고시엔)이라고 부르는 일본 고교야구 축제. 나라가 들썩거릴 정도로 화제가 되는 바로 그 대회. 모든 야구소년들의 꿈의 무대.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비주얼이다. 흙투성이가 된 고교생 야구선수가 손으로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력을 다해 맞붙었을 경기. 던지고, 때리고, 달리고 넘어지고.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 최선을 다한 경기에서 끝내 고비를 넘지 못하고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을 소년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마 그 시합이 끝난 후 동료들과 그렇게 흘렸을 눈물이다. 패배의 분함과 슬픔의 감정을 넘어 흘러넘치는 그 눈물에, 한 장의 사진에 폭풍 같은 드라마가 담겨있다.
이 사진의 힘만으로도 수많은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만, 이 광고의 압권은 짧은 카피 한 줄이다. 이 엄청난 사진을 보면서 엄청난 카피 한 줄을 더해 완벽한 끝내기 홈런을 날리고 싶은 카피라이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담당자는 다른 선택을 했다. 화려하고 멋진 카피 대신, 담백한 이 한마디만 남겼다.
강력한 사진 위에 강력한 카피를 얹어 신파를 만들지 않고, 살짝 힘을 빼 드라마를 완성했다. 강력한 비주얼이 주인공이 되도록 한 발짝 물러서 줬다.
카피라이터는 잘 쓰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잘 빼는 사람이어야 한다. 좋은 카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많이 써야겠지만, 임팩트 있고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해서는 어느 순간부터는 빼기 시작해야 한다. 좋은 글, 좋은 카피는 주로 쓰는 과정보다 빼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때로는 "카피를 완전히 없애는 카피라이팅"까지 할 수 있어야 좋은 카피라이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