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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Oct 27. 2022

"이름은 자식에게 보내는 첫 편지"

파이롯트 기업 PR 광고 (2012)


내 이름은 세 글자이다. 鄭奎泳. 


성씨인 鄭은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金. 李. 朴. 崔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많은 사람이 쓰고 있다. 국가통계포털 KOSIS에 따르면 2015년 현재 鄭씨는 2,151,879명의 성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4.3%가 쓰는 흔하디 흔한 성이다. 마지막 글자 泳은 돌림자다. '헤엄칠 영'. 수영(水泳)의 영이다. 동래 정씨 고령공파 32세손인 나를 비롯해, 내 동생, 내 사촌들, 육촌, 팔촌들 모두 쓰는 글자이다. 


결국, 내 이름 세 글자 중에서 아버지가 결정한 것은 단 한 글자 奎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한 글자이며, 나를 다른 이들과 구별해 주는 정체성이 담긴 한 글자. 


그 한 글자 때문에 아버지를 생각하며 펑펑 운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 후 1년쯤  뒤의 일이다. 긴 슬픔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던 시기였다. 늦가을 아침 무렵, 비즈니스 관련 외국 사이트에 등록하면서 '기존에 쓰던 것 말고 전혀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고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아이디를 떠올려 봤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없어  고민하는 중이었다. 내 이름 가운데 글자 奎가 별이란 뜻이니까 영어나 일본어에서 별과 관련된 단어를 찾아볼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 이름을 짓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되었다. 


30살의 아버지. 첫아들이 태어나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기뻤을 청년 아버지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골라줄 첫 글자. 아무렇게나 지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좋은 의미의 이름을 지어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고 싶은 만큼 신중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며칠을 고민하던 아버지에게 떠오른 이미지. 별.


"별처럼 빛나라"


아버지가 찾은 소중한 글자 별 규(奎)를 채워 아이의 이름이 완성되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이름을 여러 번 입으로 소리 내어 불러보며 그 이름으로 살아나갈 아이를 축복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이름을 그렇게 지었겠구나, 생각하는 데 느닷없이 눈물이 터졌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여서 그 당혹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어찌할 바 모르고 한참을 울다가 그날 하루를 무겁게 보내고 말았다. 


파이롯트의 2012년 기업 PR 광고는 그날의 당혹스러운 기억을 소환한다.   


名前は親が子供に送る、
初めての手紙なのかもしれない。


"이름은 부모가 아이에게 보내는
첫 편지 일지 모른다"


아, 그랬구나. 별처럼 빛나라는 축복의 편지였구나, 내 이름은.  나는 그 축복을 안고서 이때까지 살아왔구나. 그 축복을 안고서 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리고, 실망도 드렸겠구나. 그 축복을 안고서 아버지와 갈등하기도 멀어지기도 했겠구나.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앞으로의 삶도 그 축복과 함께 살아가겠구나. 그런데, 나는 지금 별처럼 살고 있는가. 아버지의 수십 년 전 바람에 응답하고 있는가. 


이 생각을 하기 전까지 나는 오랫동안 내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발음이 아니었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멋있는 이름도 아니고, 트렌디한 이름도 아니었다. 뜻도 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奎泳이라니. 배영, 접영, 평영 같은 별 모양의 수영법인가. 아니면 A star swims (별이 헤엄친다) 란 뜻인가. 


물론, 저 광고를 본 후 내 이름이 엄청 좋아진 건 아니다. 다만, 가운데 있는 아버지의 선택, 奎만 생각한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처럼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지. 대단한 사람은 못되었지만, 안으로 더 단단해져서 자연스럽게 내 삶의 공간에서 빛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이름, 나쁘지 않다.


이름이 멋있거나 별로거나, 이름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이름이 평범하거나 특이하거나, 우리는 모두 부모의 첫 편지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이 광고, 좋아한다.


1970년대 초중반의 어느 기차 안으로 추정된다. 누가 찍어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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