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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Nov 05. 2022

"본가 달력엔 커다란 빨간 동그라미가"

도쿄 스마트 드라이버 안전귀향 캠페인 포스터  (2014)

実家のカレンダーは、
わたしが帰る日に 大きな赤まるが付いています。

본가의 달력은
내가 돌아오는 날에 커다란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습니다.



식탁에서 아침 식사 중인 가족. 아버지는 단정하지 못한 아들의 헤어스타일이 못마땅하다. "머리 꼬락서니 하고는." 아무 대답하지 않지만, 아들의 잔뜩 부어오른 얼굴과 어떤 말을 애써 참으며 앙다무는 입 모양새를 보니 아버지의 핀잔이 오늘 하루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출근길의 아버지가 핸드폰을 놓고 나왔다. 아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의 폰을 찾기 위해 버튼을 누른다. 아버지의 벨소리를 찾아 식탁으로 다가가 핸드폰을 주어 든다. 발신자의 번호가 뜬 핸드폰에는 아들의 이름 대신 밝게 빛나고 있는 네 글자가 보인다. "나의 희망“


SK텔레콤 '사람을 향합니다' 캠페인 TV광고 (2007)

TV광고 보기: https://play.tvcf.co.kr/13887


2007년에 온에어 된 SK텔레콤의 '사랑을 향합니다' 캠페인 TV광고이다. '마음속 깊은 사랑까지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카피가 흘러나오기 전에, 이미 우리는 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다. 하고 다니는 모습부터 행동거지 하나하나 못마땅해하며, 잔소리하고 야단을 치지만, 얼마나 마음속 깊이 아들을 사랑하는지. 아마 밖에 나가서는 "그 녀석 하는 짓을 보면…." 하며 지인들에게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아들의 별 거 아닌 일을 자랑하며 떠벌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직접 말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영상이 그 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상이 묘사했기 때문이다.


샌드라 거스가 쓴 <묘사의 힘> (윌북 2021)은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고 예비 소설가들에게 조언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말하기는 단정 내린 결론을 독자에게 전해주는 일'인데 비해, ’보여주기는 독자가 인물의 오감을 통해 직접 경험하도록 만드는 일'(p.14)이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말하기는 이야기 속 세계를 발견할 기회를 박탈하지만, 보여주기는 독자가 이야기 속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앞서 설명한 광고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우가 멋진 목소리로 "앞에서 싫은 소리를 해도 부모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계십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그 시절의 나온 다른 광고들과 함께 묻혀버렸을 것이다. 그저 '나의 희망'이라는 명칭으로 핸드폰에 저장된 아들의 번호를 보여주는 것이 아무런 설명없이 훨씬 더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일본의 한 포스터에 실린 카피 한 줄을 읽어보자.



출처: www.facebook.com/japansmartdriver


実家のカレンダーは、

わたしが帰る日に

大きな赤まるが付いています。


본가의 달력은

내가 돌아오는 날에
커다란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습니다.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말이 있다. 설이나 추석 때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고향을 찾는다. 교통난에 대한 부담, 명절을 간소히 치루려는 경향 등이 맞물려 그 규모는 줄었지만, 여전히 명절에 고향을 찾는 일은 이어지고 있다. 고향의 부모 입장에서 명절은 집을 떠난 자식을 볼 수 있는 일년에 몇 안되는 기회이다. 시절이 바뀌었어도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주요한 명절이나 연휴기간에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가는 귀향행렬이 이어지곤 한다. 고향을 떠난 자식을 그리는 마음이 어찌 한국과 일본이 다르겠는가.


이 때를 즈음해 안전한 귀향을 여러 가지 홍보 캠페인이 벌어진다, 일본의 교통안전 캠페인 프로젝트인 ‘도쿄 스마트 드라이버‘포스터도 그 중 하나이다. 2014년에 나온 이 포스터의 카피도 전형적인 보여주기의 힘을 느끼게 한다. 


머리 속에 선연히 그려지는 풍경이다. 명절을 기다리는 고향의 노부부. 자식과 통화하면서 전해들은 귀향일을 달력에 커다랗게 표시를 해 놓는다. 저 날짜에 커다란 빨간 동그라미를 치면서 기뻐했을 그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 내 어머니의 얼굴과도,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외할머니의 미소와도 같을 것이다. 


명절을 며칠 앞두고 나눈 전화통화에서 바쁘고 힘들면 일부러 안 내려와도 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저 날짜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그 얼굴이다. 밖을 오갈 때도, 집안일을 할 때도 빨간 동그마리 안의 날짜가 계속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달력 위의 빨간 동그라미를 볼 때마다 자식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했을 아버지의 눈빛도 그려진다.


포스터에 “고향의 부모님은 당신이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씌여 있었다면 얼마나 당연하고 맥이 빠지는 카피가 됐을까. 본가의 달력에 쳐져 있는 빨간 동그라미를 제시하는 것만으로 우리들은 머릿속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증폭해서 받아들인다. 


보여주기의 힘은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나는 도쿄 스마트 드라이버의 광고카피를 보고 15년 전에 본 SK텔레콤 광고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광고영상이 핸드폰 속 화면에 담긴 ‘나의 희망’을 담담히 보여주는 것 대신 '부모님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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