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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Dec 07. 2022

연말정산을 하다 눈물이 터졌다

일본생명 TV광고 <소중한 것을 지킨다는 것> 편 (2018)

"이건 내가 쓴 게 아닌데?"


꽤 오래 전 겨울의 일이다.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연말정산 관련 서류를 뽑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다른 서류들은 별 문제가 없었는데, 현금영수증 관련 내역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난 현금영수증을 끊을 일이 거의 없다. 웬만한 결제는 통장에서 바로 빠져나가는 체크카드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금결제를 했다 하더라도 내역에 적힌 상호들이 전부 낯설다. 몽유병 환자도 아니고, 현금으로 그 많은 곳에서 결제를 하고 하나도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  


다른 사람 데이터와 섞였나? 국세청 데이터 오류?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내역을 보다가 상호명 중 하나에서 '목동'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엇? 본가? 그제야 희미하게 한참 전에 어머니와 나눈 대화가 생각이 났다.


본가를 방문한 어느 날인가, 어머니는 친구분한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그분은 현금을 쓸 때마다 자제분 앞으로 현금영수증을 끊는다는 것이었다. 그게 연말정산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란다. 수입이 없는 부모 입장에서 그것도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었다.


"아, 예-"


무슨 말씀인지 알았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의례적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연말정산을 알뜰히 챙기는 스타일도 아닌데다, 연말정산에서 크게 환급받아 본 기억이 많지 않아서, 환급금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연말정산에서 현금영수증 관련 공제는 그다지 크지 않아서, 실제 환급금 규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네에, 뭐...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그 겨울날, 어머니가 1년 동안 현금을 쓰신 내역이 고스란히 국세청을 거쳐 나에게 도착한 것이다. 어머니가 다녀간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내역들이 다시 보였다. 같은 단지에 있는 그 마트에서 주로 사시는구나.  5월엔 치과에도 가셨었고... 그러고 보니, 저건 아버지와 자주 가신다는 순두부집 이름이었구나...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마워하지도 않는 시큰둥한 표정의 아들의 대답을 들으시고도 어머니는 가시는 곳마다 내 이름으로 현금영수증을 끊으신 거다. 


어머니는 마트에서 당근을 살 때도 내 생각을 하셨구나. 치과치료를 받으신 뒤에도 내 생각을 하셨구나. 약국에서 약을 살 때도, 아버지와 순두부를 드실 때도, 친구분들과 커피를 드실 때도 내 생각을 하셨구나...  


어느 약국에서 내 번호를 대면서 현금영수증을 끊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데 눈물을 참아 낼 방법이 없었다. 내역에 적힌 작은 금액들이, 어떻게든 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 같아서 더욱 그랬나보다. 그날 저녁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기억을 떠 올린 건 연말정산의 계절이 다가와서는 아니다. 우연히 본 일본의 한 보험회사의 광고 때문이다.

 


광고는 캠코더로 딸의 뒷모습을 찍는 아버지의 시각에서 시작된다. "아, 쫌~ " 하면서 짜증을 내는 사춘기의 딸.  딸의 일상생활을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여주며, 아버지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입시 준비를 하는 모습, 스마트폰을 만지며 소파에서 빈둥거리는 모습에도 한 마디씩 보탠다. 지각을 하고는 왜 안 깨워줬냐고 엄마에게 타박하며 학교에 가는 모습, 남자 친구와 다정하게 등교하는 모습들이 이어진다.



힘들게 시험을 준비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건강이 제일 중요한데..." 라며 걱정스러운 혼잣말도 들린다. 시험날, 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서랍에 넣고는 다부진 표정으로 시험을 치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딸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모든 과정이 아빠의 시점에서 플래시백 된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화면이 바뀌면 손을 모아 기도하는 딸의 모습. "아빠, 대학에 가게 되었어요. 고마워요"라는 인사를 전한 뒤 벚꽃 잎이 떨어지는 길을 걸어간다. 이 때 하늘나라에서 아버지가 "축하해"라고 나지막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딸의 모습으로 광고가 끝난다. 시작 부분, 캠코더에 기록된 장면 외에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며 지켜보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엔딩에 나오는 "소중한 것을 지킨다는 것"(大切なものを、守り抜くということ)이라는 카피가 묵직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이 카피도 좋지만 나에게는 광고의 후반부, 아버지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나오는 자막이 너무나 당연해서 가슴에 와 박힌다.


父は何があってもきみの父です
아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아빠입니다.



이것이 내게는 "부모는 어디 있어도 당신의 부모입니다"로 읽혔다. 어디를 가나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현금영수증을 끊던 어머니의 모습과 오버랩이 됐다.


무슨 일이 있건, 어디에 있건 자식 생각하는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 법이다. 오늘도 어머니는 가는 곳마다 무뚝뚝한 내 생각을 하고 계실 것이다. 오늘도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가 야근하며 무리하지 않나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아래 영상은 일본생명의 90초버전의 광고다. 어디서나 무슨 일이 있으나 자식을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을 색다른 시각으로 느껴보시면 좋겠다.

출처: 일본생명 유튜브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r1gz-m5Ai_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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