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규영 Jan 15. 2023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

산토리 홀딩스 캠페인(2021)


갑자기 회사 대표전화의 벨이 울린다. 어라? 이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는 건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우리 회사는 오래된 기존 거래처와 일이 많다. 요즘 웬만한 업무연락은 담당자 핸드폰이나 메신저로 온다. 대표전화는 사실상 구색으로 놓아둔 것. '무슨 일이지?'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내 이름을 찾는다. 내가 맞다고 하니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상대편 남자. 


"나야... 영민이"


영민이? 이름이 비슷한 몇 명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목소리만으로는 누구인지 모르겠다. "어...어..."하며 대답을 주저하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자신의 성까지 이야기를 해준다. 그제야 얼굴이 떠오른다. 20여 년 정도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때의 친구였다.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내 모교 동문회보에 실린 기사를 찾아내 회사이름을 알아냈고, 회사 이름을 검색하여 전화번호를 찾았다고 한다. 20년 만에 닿은 연락에 반가움과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이 동시에 엉킨다. 몇 분 정도 대화가 오고간 후 다음날 점심때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고 흥분된 마음이 다소 진정이 되자, 친구와의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30여 년 전, 고등학생 시절의 일들이었다. 놀랍게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포장마차 떡볶이였다.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던 그 길목에 있던 포장마차에서 우리는 떡볶이와 튀김을 사 먹곤 했다. 


그다음 떠오른 것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카페 라보엠. 근처 시장 입구에 있던 카페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고, 미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도 가끔씩 그곳에서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신기했다. 20여 년 만에 연락 온 친구와의 30여 년 전 추억 중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떡볶이 포장마차와 아지트였던 카페라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친구와의 추억뿐 아니라 수많은 인생의 장면들이 음식점을 배경으로 새겨져 있다.  


부모님과 처음 함께 갔던 통닭집의 기억.

이모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갔던 개봉역 앞 만두집.

삼촌의 대학졸업식 후 찾은 흑석동의 중국 음식점.

대학시절 내내 선후배, 친구들과 가서 울고 웃었던 호프집 포시즌.

수많은 고민을 털어놨고, 또 수많은 고민을 들어줬던 학교 앞 주점 물레야.
내 소개로 결혼한 선희와 인철이가 연애시절 거하게 밥을 산 가로수길의 일식집 

촬영이 끝난 새벽 4시, 지친 귀가 길에 꼭 들렀던 자양동의 기계우동 집.

아이의 재롱에 행복해하며 아내와 함께 다닌 수많은 음식점들.

아버지와 마지막 여행 때 들렀던 군산의 중식당과 담양의 한식집.

...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중요 장면들을 음식점에서 남겼을 것이다. 음식을 먹으며 또 술을 마시며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났을 것이다. 산토리의 2021년 캠페인은 바로 그 공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人生には、飲食店がいる) 시리즈이다. 한참 코로나 사태로 음식점들이 어려움을 겪던 시절, 일본의 음식점들을 응원하기 위해 기획된 시리즈다. 음식점이 단지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연결되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그곳은 신기한 곳이다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말할 수 있게도 되고 
몰랐던 나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

별 거 아닌 일에 눈물이 날 정도로 웃기도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모두 기분 좋은 얼굴이 되어 있곤 한다 

신기한 힘이 그곳에 있다 
이렇게 시끌벅적한데 모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웃고 말하는 

人生には、飲食店がいる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



이 TV광고는 23개의 유명 영화와 드라마의 음식점 장면을 편집해 만들어 크게 화제가 됐다. 동영상 광고 외에도 인쇄광고, 아웃도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다. 수만 개의 포스터와 스티커를 음식점들에 배포하기도 했다. 지금도 산토리의 이 캠페인 페이지에는 20여 개의 포스터를 다운로드하도록 해놓고 있다. 각 포스터에는 음식점에 얽힌 짧은 카피들이 적혀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인사이트들이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음식점의 기억이 
인생의 기억이 된다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




상담해주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가 상담을 받고 있다.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




다 함께 이야기해 보면
정답은 하나가 아니란 걸 
잘 알게 돼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



사랑에는
만나는 장소가 필요하다.
잊는 장소도 필요하다.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




"미안해"
"고마워"
"좋아해"를 

한마디로 하면 
"한잔 하자"가 됩니다.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




음식점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는 캠페인. 우리 인생의 소중한 무대 중 하나인 음식점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캠페인. 음료와 주류를 주로 판매하는 산토리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시리즈는 제70회 아사히광고상 광고주최고상, 제13회 주니치신문 광고대상 일반지부분 최우수상을 받았고 제75회 광고덴츠상에서는  종합상, 필름광고최고상, 브랜드익스피리언스상을 휩쓸었다. 또한 2022년 도쿄 카피라이터스 클럽(TCC: Tokyo Copywriters Club)이 선정한 TCC그랑프리를 받아 광고의 완성도뿐 아니라 카피 자체로도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전화 통화를 한 다음날 점심, 서촌 입구에 있는 우리 회사 앞에서 영민이를 만났다. 약간 주름이 늘고 배가 조금 나온 것 외에는 20여 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나는 사무실 근처 삼계탕집으로 영민이를 데려갔다. 나에게 소중한 손님이 올 때마다 찾는 곳이다. 20년이 또 지나면 우리는 이런 말을 하면서 그날을 회상할 것이다. 


"20년 만에 다시 만난 날, 우리 그 삼계탕집에 갔었잖아..."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









카피 해석에 관한 덧붙임: 

일본어 카피 원문 "人生には、飲食店がいる"는 인생에는 음식점이 있다로 해석하기 쉽다. 그런데 일본어에서 사람이나 생명의 경우에만 '있다'는 뜻으로 いる(居る: 이루)를 쓴다. 이 문장의 주어 음식점은 생명체가 아니기에 ある(아루)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왜  いる를 쓴 것일까.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일까? 이 카피에서 いる는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필요하다'는 뜻의 단어로 발음만 같은  要る(いる:이루)이다. 그런데, 要る라고 한자어를 써서 명확하게 뜻을 알려주지 않고 헷갈리게 히라가나로 いる라고 썼다. 


아마도 '필요하다'는 의미와 함께 음식점을 마치 생명처럼 살아 숨 쉬는 공간의 의미가 느껴지게 한자가 아닌 히라가나로 いる를 쓴 것 같다. 그래서 문법적으로 정확한 카피의 해석은 "인생에는 음식점이 필요하다"가 맞지만 원문의 문학적인 느낌을 살려 "인생에는 음식점이 있다"로 해석될 수도 있다. 도쿄 카피라이터스 클럽에서 이 작품을 그랑프리로 뽑은 것에는 이런 의도까지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부분의 해석과 의미파악은 내 브런치 글의 일본어 해석에 늘 조언을 해주는 우리 회사 김문원 PD와 나의 일본어 선생님인 요시야마 히카리 (吉山 光)님의 의견을 참조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하게 된 과목에는 좋아하게 해 준 선생님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