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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Jan 12. 2023

"좋아하게 된 과목에는 좋아하게 해 준 선생님이 있다"

일본 교육대학원 대학 인쇄광고 

중학생 시절 국어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그 성적과 자신감은 계속 유지돼서 대입 학력고사까지 이어졌다. 원래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즐겨한 영향도 있겠지만, 국어 수업시간만큼은 딴짓을 안 하고 집중해서 공부한 이유가 컸을 것이다. 수업을 잘 들을 만했다. 국어 선생님들이 좋았다.  


1-2학년때는 같은 선생님이었다. 보통 키에 굵은 웨이브가 있는 단발머리의 친절한 선생님이셨다. 키가 작아서 교실 앞줄에 앉아 있던 나를 예뻐해 주셨다. 예쁨 받는 학생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수업을  잘 듣고, 알아서 공부한다. 그럼 당연히 성적이 좋다. 시험이 끝나면 특히 국어성적이 좋은 나를 칭찬해 주셨고, 그 칭찬에 열심히 공부했다. 이상적인 선순환이었다.

가혹한 체벌로 악명이 높았던 기술 선생님과 결혼을 해 충격을 안겨주시긴 했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기술 선생님은 당구큐대로 학생들을 때려 별명이 '큐대'였다. 천사 같은 국어 선생님이 '큐대'와 결혼하신 건 36년이 지난 지금도 찬성할 수 없다!)


3학년때는 키가 크고 안경을 낀 긴 생머리의 선생님이셨다. 재미있는 선생님이었다. 농담도 잘하셨고, 권위의식 없이 모든 학생들을 편하게 대해 주셨기에 인기가 좋았다. 가끔 짓궂은 장난을 하는 학생들에게도 웃음으로 대해 주셨다. 책을 빌리러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자주 뵙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만난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면, 동경하는 선생님과 친해진 것 같은 기분에 으쓱해하기도 했다.

한참 만화가가 꿈이던 시절이었다. 직접 그린 만화를 늘 크게 칭찬해 주셨다. 다른 반의 담임을 맡고 계셨는데, 그 반의 학급신문에 삽화를 부탁하시기도 했다.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필생의 역작을 그리는 화가처럼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 선생님이 맡은 과목을 잘 못하는 게 더 어려운 일 아닌가.




모두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재미있어서 좋아했던 선생님. 나를 잘 이해해 주셔서 좋아했던 선생님. 멋있어서 좋아했던 선생님. 잘 가르쳐주셔서 좋아했던 선생님. 그냥 좋아했던 선생님. 그리고 그 선생님 때문에 그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던 추억.


일본교육대학원대학의 광고는 그런 모두의 공감 위에, 바로 이런 선생님이 되자는 이야기를 던진다. 





好きになった教科には、 
好きにしてくれた先生がいる。

좋아하게 된 과목에는 
좋아하게 해 준 선생님이 있다. 



학교명 옆에는 '좋은 선생님이 되자'는 슬로건이 쓰여 있다.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의 슬로건 치고는 너무 당연하고 재미없는 말이다. 그러나 '좋아하게 된 과목에는 좋아하게 해 준 선생님이 있다'는 카피 뒤에 붙어 있으니 특별한 느낌이 든다. 좋은 선생님의 방향이 그려진다. 그 과목을 좋아하게 해주는 선생님. 내가 좋아했던 과목의 선생님들이 떠오른다.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게 만드는 카피다.


이 광고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누구나 좋아하는 교과목, 싫어하는 교과목은 있는 법입니다.  

어른이 되어 돌아보면 좋아하게 된 교과목에는 꼭 인상에 남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세계의 넓이를 말해준 영어 선생님. 

생물의 신기함에 눈을 뜨게 해 준 이과 선생님.

역사에 잠든 인간의 드라마를 가르쳐 준 사회 선생님. 


그런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그 교과목이 좋아서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전해졌다는 것. 

전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는 것. 

그래서 암기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에 남아, 다음 수업이 기대되는 것.


어떤 시대에서도 요구되는 것은, 교과 지도를 통해서, 

수업에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교사. 

수업에 아이들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 프로페셔널한 교사인 것입니다. 




요즘 교사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지만, 여전히 일선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학생들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좋은 선생님들이 많다. 오늘도 어떤 학교의 어느 교실에서는 좋아하는 선생님의 설명에 귀를 쫑긋 세우며 세상에 눈떠가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언젠가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을 품고 세상에 나가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갈 것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중학생 시절의 국어 선생님들이 뵙고 싶어 진다. 20대 후반이셨던 두 선생님은 이제 60대 중반이 되셨을 것이다. 키 작은 까까머리 중학생이 선생님들 덕분에 국어를 좋아했고, 그때 배운 국어실력으로 대학도 가고, 수많은 광고를 만들어왔다고 말씀드리면 기뻐하실 것 같다. 아, 그런데 기억은 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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