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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Jan 10. 2023

"나는 분명 상상이상이다"

포카리스웨트 포스터 (2018)


20여 년 전. 광고대행사 4년 차 때였다. 대형 경쟁 PT에서 프리젠터를 맡게 됐다. 전략 부분은 기획팀의 부장급이 발표를 하고, 나는 제작팀을 대표해서 TV광고안 설명을 하기로 했다. 기존 광고주 앞에서 시안 설명을 한 적은 있었지만, 경쟁 PT의 프리젠터는 처음이라 큰 부담이 됐다. 특히나, 대형광고주 영입을 위한 경쟁이었기에 더욱 큰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멋지게 프리젠팅을 하는 선배들을 동경하며, 언젠가 나도 저 자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지는 몰랐다. 아, 아직 난 준비가 안 됐는데…  발표자로 낙점을 받은 후 프리젠테이션날까지 무시무시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발표할 문안을 써서 외워보기도 하고 여러 번 연습을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편히 발 뻗고 잘 수도 없었다.


PT당일이 됐다. 정말 온몸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날 회사 승합차를 타고 출발하던 장면, 발표할 건물 주변의 풍경, 주차장 모습까지 기억이 나는데, 발표장에서의 기억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그만큼 긴장감이 컸다. 아마 광고회사 생활을 통틀어 가장 크게 긴장한 날이었던 것 같다. 혹시 충격적인 실수가 있어서 두뇌의 자기보호매커니즘이 기억을 없애버린 것이면 어떡하나 염려한 적도 있다.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다. 내 발표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선배들이 격려해 줬고, 이후에도 곧잘 프리젠터가 맡겨졌다. 


발표 횟수가 늘면서 긴장감은 적응됐지만 프리젠테이션에서 위축되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컨셉이 틀렸으면 어떡하지? 아이디어가 별로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허점을 찌르는 질문이 나오면 어떡하지?


그러다가 어느 선배의 조언을 들은 후로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발표 직전까지는 우리가 준비한 것을 계속 의심해보는 게 맞아. 그런데, 일단 발표를 시작하면 이렇게 생각해. 무조건 내가 제일이다! 내가 준비한 게 정답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한 수 가르쳐주마!


피식 웃음이 나올만큼 별 거 아닌 조언이었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발표를 앞두고는 스스로 내가 제일이라고 여러번 되뇌인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나서 가슴을 한번 친 뒤 고개를 빳빳이 든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괜히 용기가 생겼다. 알 수 없는 힘이 나왔다. 자신있게 발표를 하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도 여유롭게 대응할 수 있었다. 


물론, 경험이 쌓인 후로는 굳이 그런 세레모니를 하지 않아도 되는 프리젠터가 됐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보면 잔뜩 쫄은 주제에 스스로에게 억지로 용기를 불어넣던 초짜 프리젠터 시절이 생각나 괜히 웃음이 난다. 


2018년에 나온 포카리스웨트 포스터다. 



결연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소녀의 모습에 심플하게 얹어진 카피 한 줄이 인상적이다. 



自分は、
きっと
想像以上だ。

나는
분명
상상이상이다.



한국의 포카리스웨트 광고는 오랫동안 20대 초중반의 순수한 이미지의 젊은 여성 모델을 기용해왔다. 특유의 배경음악 멜로디와 함께 바닷가를 달리는 흰 옷의 소녀가 머리에 떠오른다. 이와 달리, 일본의 포카리 스웨트는 청소년들의 잠재력을 응원하는 캠페인을 펼쳐왔다. 주로 교복을 입은 10대 학생이 등장한다. 여러 학생들이 군무를 춘다거나, 한 학생이 더 큰 가능성을 향해 전진하는 이미지를 여러 가지 크리에이티브를 통해 보여줬다. 


이 카피가 적혀있는 포스터가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한 소녀의 모습 혹은 여러 학생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모두 한국 포카리스웨트 스타일의 순수함과는 거리가 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담긴 표정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분명 상상이상’이라는 카피와 딱 맞아 떨어진다. 이 메시지는 불투명한 미래 앞에 선 10대들에게 말한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능성이 큰 사람이라고.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그런데, 스스로 상상이상이라고 되뇌며 힘을 내는 것은 청소년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발표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회사원, 휫슬을 기다리는 운동선수, 오디션 무대로 오르기 직전의 가수지망생에게도 필요할 수 있다. 나이와 상황에 상관없이 자신의 한계에 맞닥뜨릴 모든 사람에게 효과 있는 처방이 될 것이다.




어제 아침 주간업무 회의를 너무 무겁게 해서 직원들에게 필요이상의 걱정을 안긴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도, 괜한 이야기를 추가하며 수습하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넘어가야겠다. 다음 회의에서 느닷없이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분명 상상이상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직원들이 더 걱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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