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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Jan 21. 2023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는 것들

산토리 크라프트 위스키 TV광고 (2020)

아버지는 정종을 좋아하셨다. 왠지 으스스한 기운이 도는 추운 늦가을 무렵, 학교나 회사에서 밤늦게 돌아오면 식탁에 혼자 앉아 계시는 아버지를 발견하곤 했다. 냉장고에 있던 오이나 당근 같은 간단한 안주거리를 놓고 따뜻하게 데운 정종을 큰 유리컵에 담아 드셨다. 인사를 하고 식탁 앞을 질러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나에게 물으셨다.


"한 잔 할래?"

"에이~ 전 술 못하잖아요"

"그래, 들어가라"


주량이랄 것도 없는 내 주량은 1잔이다. 그 이상을 마시면 토하거나 쏟아지는 잠과 싸워야 했다. 그래도 학교와 회사의 술자리에 빠지지 않았다. 아니, 빠지지 못했다. 그것이 이른바 사회생활이었다. 음주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던 그 시절, 나에게 술자리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술을 받아 마시고, 따라 주었다. 술이 몸에 잘 안 받아 못 마신다고 말하면 정신력이 약하다고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피곤에 지친 몸으로 돌아와, 집에서까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술을 못 마신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지만, 같은 장면이 재현되면 아버지는 예외 없이 "한 잔 할래?"하고 물으셨다. 내 대답도 늘 똑같았다.


아버지는 강권하지 않으셨다. '밖에서는 마시고 다니면서 아버지와는 한 잔 같이 하는 법이 없다'고 불평하시지도 않으셨다. 내 방을 향하는 순간 나에겐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혼술 자리는 얼마간 더 지속되었을 것이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 그리고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셨을 것이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그 식탁을 자꾸 되돌아보게 하는 광고가 있다.


산토리의 크라프트 위스키 메이커스 마크의 TV광고 '아버지의 날' 편이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미남배우 오구리 슌(小栗旬)이 아들로, 70대의 노배우 히노 쇼헤이(火野正平)가 아버지 역으로 등장한다.



노인이 현관문을 열자 발견한 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듯한 아들의 모습. 술병을 들어 보이며 "아버지의 날이라서..." 하고 인사하는 아들을 별 표정 없이 맞는다. 아무말 없이 잔을 꺼내는 아버지를 보며 '평소에 잘 안쓰는 아끼는 잔을 꺼내왔다'는 아들의 독백이 들린다. 변화가 없는 건 아버지의 얼굴뿐,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맛있어요?" 아들이 묻자 그제서야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머금어진다. 




"お前も、

息子にウィスキーをもらったらわかるよ。"


"너도

아들에게 위스키를 받으면 알게 될 거다."




왠지 알듯말듯하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짓는 아들.


"언제 또 올 거냐?"


"설날쯤일까요"


"...멀구나"


두 사람의 술자리는 깊어만 간다.



우리나라는 5월 8일이 어버이날이다. 처음엔 미국의 영향으로 '어머니의 날'이었는데, 1970년대에 '어버이날' 이름을 바꿔 아버지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일본은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이 따로 있다. 어머니의 날(母の日)은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 아버지의 날(父の日)은 6월 셋째 주 일요일이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어머니의 날을 좀 더 신경 쓰는 편이라고 한다. 어디 가나 아빠들은 대접을 좀 덜 받는가 보다.


다행히 이 광고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챙긴다. 보통의 다른 부자관계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대화가 있거나 살가운 표현이 오가지는 않는다. 예상치 않은 방문, 알 수 없는 아버지의 표정은 이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멀구나' 그 한마디에 말로 다 하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다. 완성도 높은 콘티와 카피를 관록 있는 배우들이 무게감 있게 표현했다. 눈빛과 얼굴 표정으로 광고에는 보이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드라마까지 느끼게 하는  수작이다.


이 광고를 보면 내가 수없이 그냥 지나쳐온 그 식탁 앞이 떠오른다. 돌아가시기 전에 광고 속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술잔을 받는 평범한 기쁨을 많이 드릴걸. 아버지의 옆에 앉기라도 더 할걸. 마시지 않을지라도 정종 한잔을 앞에 두고 "힘드시죠?" 그 한마디라도 할걸.




내일은 설이다. 정종을 준비했다. 따라 드릴 수 있을 때 하지 못하면, 설날에나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동영상보기:

출처: https://twitter.com/suntory/status/126621662148954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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