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틀림없이 이메일을 확인하려고 브라우저를 띄웠다. 받은 메일함에서 새 메일들을 훑어보다가 미디어 관련 뉴스레터의 제목에 눈이 먼저 갔다. 'ChatGPT 열풍과 AI시대의 마케팅'. 광고인으로서 트렌드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짧은 아티클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하단의 썸네일도 클릭한다. "일론 머스크는 요즘 왜 이런지 모르겠네..." 혀를 끌끌 차면서 추천기사로 이동하니 어느새 포털 사이트로 나와 있다. 사이트의 상단에 있는 서울 날씨가 보인다.
정말 날씨만 확인하려고 했다. 자가운전자가 겨울철 날씨에 민감한 건 당연하지 않은가. 내일 눈이 올 확률이 좀 있다고 한다. 오케이. 날씨 아래쪽에 뉴스가 보인다. 경제 뉴스를 몇개 챙겨보고는 옆의 탭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오마이걸의 효정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다고 한다. 본방사수를 다짐해 본다. 스포츠 탭으로 옮겨 프로야구와 배구 기사를 몇개 보는데 '띵-' 하는 작은 알람 소리가 들린다. 파란 페북 로고 옆에 뜬 숫자(2)를 안보고 넘어가기 어렵다.
진심이다. 페이스북에서 댓글만 확인하려고 했다. 어제 내가 쓴 게시물에 친구가 댓글을 달았으니 읽어보는 건 최소한의 예의 아닌가. 짧은 댓글을 단 뒤 좋아요, 꾹-. 페북 피드에 여러 글이 올라와 있다. 페친들이 쓴 글을 몇 개 훑어내려 간다. "주현이 딸이 벌써 초등학교 졸업을 했네. " "김 실장은 일본 여행 갔구나. 부럽다" "저 정치인이 또 거짓말을 했다구?" 페이스북 피드를 빠르게 따라가다가 클릭을 한 것은 미디어 관련 글을 많이 쓰는 한 마케터가 공유한 영상.
공유된그 짧은 인터뷰만 보려고 했다.필요한 정보가 들어있을 지 누가 아는가. 영상이 끝나자 유튜브 피드가 유혹한다. '알쓸인잡'의 짤, 오마이걸 채널의 신규영상, 브랜딩 관련 영상, 북튜버의 책소개 등 원래 예정에 없던 몇편을 이어 봤다.짧은 숏츠영상 까지 후루룩 보고 있는데 카톡 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세무사님이다.
세무법인에서 요청한 추가자료만 빨리 보내주려고 했다. 세무 업무는 중요하니까. 지난달 자료 중에 빠진 걸 챙겨 보내고 나니 새로운 메시지 몇 개가 눈에 들어온다. 아내와는 아들 치과 가는 날을 맞췄다. 박감독님과는 모레 아침에 미팅 약속을 잡는다. 편집실에서 보내온 샘플작업 영상파일을 검토한 뒤 수정사항을 전달한다.
영상파일? 아, 맞다. 동영상 제작과 관련한 메일을 읽어야 했지, 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1시간이 지나있다.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주는 광고가 있다. 산토리가 만들어 판매하는 '캔 소주 칵테일' 바 포무의 TV광고이다. 바 포무 같은 술을 츄하이 (チューハイ)라고 부른다. 소주에 탄산과 과즙이 들어간 술로 쇼추(焼酎: しょうちゅう)와 하이볼(ハイボール)의 합성어 '쇼츄하이보루'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광고는 20-30대 여성을 타겟으로 집에서 혼자서 즐기는 가벼운 주류로 제품을 포지셔닝하고 있다.
광고의 모델은 이제 막 30살이 된 배우 혼다 츠바사(本田 翼). 많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나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연기력보다는 패셔너블하고 도시적인 이미지가 돋보여 수많은 브랜드의 광고모델을 섭렵 중이다.
영상은자신의 집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SNS, 음악, 메시지, 게임, 동영상 등을 상징하는 수많은 아이콘들이 어지럽게 그녀 주변을 맴돈다.
그녀의 독백.
時々、世界を全無視できる強さも大切だったりして ...
가끔은 세상에 완전히 신경을 꺼버릴 수 있는 힘이 소중하기도 하고...
뭔가 생각 난 그녀가 캔을 딱-하고 따는 순간아이콘들이 다 사라진다. 그녀의 맞은편 벽에 BAR POMUM 라는 네온사인 불이 들어오며 진짜 바(bar)가 생긴다. (어? 이건 완전히 일본판 '나래BAR'다. 모델의 이름인 츠바사는 한문으로 날개 익(翼)자를 쓴다.)
바에 걸터 앉아 여유롭게 한잔을 마시는 그녀. 조용한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아무런 메시지나 즐길거리의 연결로부터 자유롭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의 독백이 조용히 들려온다.
私には ぼーっとする時間が必要です。
나에게는 멍때릴 시간이 필요합니다
카피 자체는 매우 단조롭다. 영상도 평이하다. 하지만 그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의 상황은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요즘 우리들의 절실한 필요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래서 이 단순한 카피에 귀가 바로 반응했나보다.
너무 많은 정보와 즐길거리들. 한번 창을 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세상.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한 발 빼낼 수 있는 자각과 힘이 필요하다. 좋은 것만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공간에서는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듯이, 유용하고 재미있는 것만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시간에서는어떤 여유도, 새롭게 충전되는 힘도 가지기 어렵다.
아이러니하다. 예전에는 '좀 재미있는 거 없을까?'하며 멍하니 있는 시간을 벗어나려고 애썼는데, 이제는'좀 멍하니 있을 수 없을까?'하며 텅 빈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야 한다.
아, 다시 생각났다. 아까 그 이메일을 읽기 위해 다시 브라우저를 켠다. 흠.... 이번에는 저 많은 정보와 재미의 지뢰밭을 뚫고 이메일을 읽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