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 제법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만화연재, 일러스트작업, 과외교사, 식당서빙, 사무보조, 음식배달 등 분야도 다양했다. 며칠짜리 일도 있었고, 몇 년간 지속한 것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2학년을 마치고 휴학 중에 중국 음식점에서 겪은 것이었다. 고척동의 한 공구상가에서 점심 피크타임 때 배달을 하고, 그릇을 수거하는 일이었다.
2년간 내가 대학생이라고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 손에 교과서 대신 배달통이 쥐어지는 순간 나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배달원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철가방이라 했다. 배달원을 함부로 낮춰보고 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배달을 하며 반말과 매너없는 행동에 대처하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았다. 배달이 끝난 후가 힘들었다. 가게 이름이 프린트된 스티커를 상가내 사무실을 돌며 배포하는게 곤욕이었다. 노크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를 쏘아보던 짜증난 눈빛, 벌레를 보는 듯 찡그린 얼굴들을 감내하는 것이 힘들었다. 학생이란 신분일 때 받아본 적 없는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몰랐다.
결정적인 사건이 배달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날 벌어졌다. 가게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어느 사무실에 짜장면 한 그릇을 배달하러 갔다. 짜장면과 단무지, 양파, 춘장을 내려놓고 가려는데 50대 후반쯤이었던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야, 김치는?”
“아, 네. 김치는 밥 종류에만 나오는데요. 면 종류는 단무지만...”
배달일을 시작하면서 배운대로 이야기를 했다.그런데 갑자기 아저씨가 폭발한 것이다.
“뭐? 어디서 말대꾸야, 짜장면이나 배달하는 주제에! 예전에는 가져다줬다고! ”
아저씨는 식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왜 김치를 안 가져다줬냐’에서부터 ‘배달하는 녀석이 건방지게 말대꾸를 했다’는 컴플레인까지 쏟아부었다.
"돌아가, 이 새끼야!" 주인 아주머니가 김치를 가지고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수화기 너머로 듣고는 아저씨의 욕설을 뒤로 한 채 사무실에서 나왔다. 억울한 마음과 가게에 폐를 끼쳐서 혼날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 가게로 돌아오는 길에 주인 아줌마를 만났다. 한 소리 들을까 봐 쭈뼛거리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나를 오히려 두둔해 주셨다. “괜찮아, 너 잘못한 거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너그러운 주인 덕분에 그날은 별일 없이 넘어갔지만, 꽤 오랫동안 나는 커다란 질문 앞에 놓였다. 학생이라는 신분의 보호막 하나만 거둬내면, 어디서나 함부로 대해질 수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극단적으로 무례한 고객에게 당한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학생으로서 얼마나 많이 보호받고, 대우를 받고 살아왔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기회가 됐다.
트라우마이자 좋은 경험이 됐던, 그 사건을 오랜만에 끄집어낸 것은 맥도날드의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 카피이다.
판매, 배달을 비롯해 여러 가지 업무를 하는 사람들의 평범한 이미지 위에 쓰인 헤드라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첫 아르바이트는 맥도날드 였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바디카피에는 시급과 조건 대신 맥도날드에서 일하며 경험한 것을 아르바이트 생의 시선으로 담담히 말해준다.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낸 것도 처음으로 가족 이외의 어른에게 칭찬받은 것도 처음으로 세대를 초월한 동료가 생긴 것도 처음으로 일한 맥도날드였다.
그때 손에 넣었던 것들은 지금도 살아있다.
この経験は、 一生もの。 이 경험은 일생의 것.
이 카피를 읽으면서, 중국집 배달 일 외에도 경험했던 많은 아르바이트들이 생각났다. 다른 일들도 단순히 돈만 벌고 끝나는 일은 없었다. 본격적인 사회진출에 앞서 세상의 단맛과 쓴맛을 알려준 일종의 맛보기 세션이 됐다.
처음 맡은 과외는 누군가에게 대가를 받는 것의 엄중함을 가르쳐줬다. 친구의 소개로 같은 동네의 중학생을 맡아서 가르쳤다. 학생의 어머니는 젠틀하고 매너가 좋으셨다. 학생도 비교적 진지하게 잘 따라와줬다. 성적도 다행히 올랐지만, 성적표가 나올 때까지 늘 전전긍긍했다. 돈을 받고 한 일에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이 갓 20살이 된 학생에게는 태산처럼 느껴졌다.
점심시간 폭발적으로 손님이 오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는 주방에서 나오는 음식을 제대로 테이블에 분배할 ’일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착한 학생, 공부 잘하는 학생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학생이라고 관대하게 대해주는 주인 분들도 많았지만 사회는 사회였다.
만화와 삽화 아르바이트는 데드라인에 맞춰 맡은 일을 끝내는 훈련이 됐다. 학생이라고 마감이 연기되지는 않았다. 마감이 닥쳤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안 나와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내 그림이 잡지나 산문에 실리는 기쁨도 안겨줬고, 발주한 잡지사나 신문사가 망해서 원고료를 못 받게 되는 실망스러운 경험도 만들어줬다.
수많은 고용주와 손님들을 마주한 경험은 강의실과 경제학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가르쳐줬다. 좋은 경험은 좋은 경험대로, 나쁜 경험은 나쁜 경험대로 내 일생의 것이 되었다. 통장에 찍힌 페이만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가치가 담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