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의 어느 날, MBC <특종 TV연예>의 '신인무대'에서 3인조 댄스그룹이 받은 전문가 평이다. 노래를 마치고 긴장된 표정으로 평가를 듣던 청년들이 받은 평점은 평균 7.8이었다. 이들은 프로그램의 역대 최저점을 받은 출연자가 됐다. 한국 음악계를 완전히 바꿔버린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드라마틱했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몇 십 년간 한국 대중음악의 대세였던 트로트와 발라드에 젖어있던 그들의 눈과 귀에 3인조의 무대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편일률적인 대중음악에 염증을 느끼던 젊은이들의 갈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낮은 점수를 줬지만,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서태지가 나올 무렵, 나는 학보 기자였다. 처음으로 총학생회실과 학보사에 PC가 들어오던 때였다. 40메가짜리 하드가 달린 286 삼보컴퓨터. 타이핑을 할 줄 알던 나와 다른 한 명의 친구가 원고지 대신 아래아 한글 1.5 판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놀라웠다. 너무 편했다. 이것이 바로 혁명이었다. 기사를 수정할 때마다 원고지에 다시 쓸 필요 없이 모니터를 보며 편집하고 수정하면 그만이었다. 기사작성 시간은 줄고, 질은 좋아졌다.
그러다가 학보사를 찾은 퇴임선배에게 경고를 받았다. "글이란 원래 원고지에 손으로 꾹꾹 눌러 써야 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럼, 아예 먹을 갈아서 붓으로 써야 하지 않나요?'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 올라왔으나,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빠른 속도로 썼다 지웠다 하는 모습이 생각없이가볍게 글을 쓰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러나 컴퓨터로 쓰는 흐름은 선배가 막아서서 멈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금세 모든 기자들이 컴퓨터로 기사를 쓰게 됐다.
새로운 것이 처음 등장할 때 기존의 관념과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 혁신적인 것일수록 기존 질서의 저항감은 더 크다.
바로 이 점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광고가 있다. 1876년 설립된 인쇄회사 DNP(大日本印刷 :다이닛폰인쇄)의 신문광고다. 1896년 아테네 올림픽 육상종목의 출발직전 사진이 메인 이미지로 활용되었다.
출발선에 선 선수들의 모습. 모두가 두 팔을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자유롭게 두고 있다. 그런데 한 선수가 땅바닥에 손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위에 작은 글씨가 쓰여 있다.
그때 관중들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한 선수가 양손을 지면에 대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진 밑에 있는 헤드라인이 이 광고의 주제를 명확하게 말해준다.
イノベーションは、 このような形で突如現れる。
이노베이션은 이런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난다.
스탠딩 스타트가 당연하던 시절에, 소위 크라우칭 스타트(Crouching Start)를 처음 선보이며 금메달을 딴 미국의 토머스 버크(Thomas E. Burke) 선수의 이야기다. 단거리 경주에서 균형을 잡아주면서 순발력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스타트법이라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처음 이 자세를 봤을 때는많은 이들이 기이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 광고의 바디카피는 자세히 설명을 한다.
이처럼 혁신은 세상에 갑자기 나타나면,
처음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상식으로 바뀌어
세상의 당연한 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광고는 DNP가 혁신을 앞서 만들어가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된다.
未来のあたりまえをつくる DNP
미래의 당연한 것을 만든다 다이닛폰인쇄
'머지않아 세상의 당연한 것이 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양태는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도 다르고, 종사하는 업종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먼저 눈치챌 것이고, 어떤 이는 금세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끝까지 버티고 있을 것이다.
컴퓨터로 기사를 쓰고 서태지에 감탄하던 20대 초반의 그 학생은 오래전에 기존 질서를 상징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기존 광고 시장에 익숙해져 있는 시각에서 보면 낯선 미디어와 기술들이 몰려들고 있다. 모바일과 인터넷 중심의 광고시장에 겨우 적응하나 했더니, 이제는 AI 열풍이다. ChatGPT, AI 이미징, AI 카피라이팅, AI 영상제작 등에 대한 이야기로 뜨겁다. 변화의 속도도 빠르다.
열린 선배가 되는 것은 힘들다. 세상을 꿰뚫어보며 리드할 수 없다면, 계속 배우고 따라가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최소한"달리기란 원래 선 채로출발하는 것"이라며 다음 세대의 길을 막아서지는 말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