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저장된 외국 카피라이터의 이미지이다. 실제로는 본 적도 없는 백발의 카피라이터의 잔상이 새겨져 있는 건, 어디선가 읽은 글들과 광고계 선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서양의 광고대행사 제작팀비교와 관련된 것이다.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광고대행사에서 제작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며 회사 조직상 제작팀장으로 기능한다. 보통은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 등을 팀원으로 두고 일한다. 대개 디자이너나 카피라이터가 ‘승진’을 해서 CD가 된다.
외국의 대행사에서도 CD가 크리에이티브를 책임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디자이너나 카피라이터 위에서 군림하는 상사가 아니라고 한다. 외국에서도 역시 카피라이터가 CD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 제작을 책임지는 것 보다 카피를 쓰는 것이 더 좋은 카피라이터는 나이가 들어도 카피라이터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CD가 수직적으로 카피라이터를 거느리는 구조가 아니기에 경험 많은 카피라이터를 존중하며 협업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백발이 성성한 카피라이터가 존재하는 것. 그들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카피에 담을 수 있게 된다.
한국에도 나이 많은 카피라이터들이 있다. 주로 독립한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들이다. 그러나 대다수를 차지하는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는 CD의 팀원으로 기능하는 젊은 카피라이터다. 카피라이터 출신 CD가 카피라이터 역할을 함께 하기도 하지만 CD로서의 역할이 우선이다. 대행사에 나이가 많은 전문 카피라이터가 있다? 이것은 승진을 못했다는 이야기다. 백발의 전문 카피라이터가 한국 대행사에 없는 이유다.
카피라이터가 성장하면 관리자가 되어야 하는 현실. 거기에 특히나 젊고 새로운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광고계의 영향이 경험많은 카피라이터를 없애는 것은 아닐런지. 카피라이터 뿐이 아니다. 광고기획자, 디자이너,프로듀서, 감독 등 한 시절을 풍미했던 광고계의 대선배들이 아쉬운 모습으로 업계에서 물러나는 일을 자주 보게 된다. 씁슬하다.
그런 기분 때문인지, 산토리의 이 옛날 광고 카피는 두고 두고 떠올리며 음미하게 된다.
時は流れない。 それは積み重なる。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쌓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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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온에어된 산토리 크레스트 12년 TV광고이다. 007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배우 숀 코너리의 그윽한 모습이 돋보이는 영상이다. 세월의 깊이가 담긴 그의 등장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광고. 오랜 시간을 거쳐 온 완숙한 신사가 자신의 공간에서 여유롭게 위스키를 즐기는 장면 위에 딱 한줄의 카피가 던져진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쌓이는 것이다."
오랜시간 숙성된 그윽한 향과 맛의 위스키. 그 인간화가 바로 숀 코너리 아닌가. 완벽한 캐스팅이다. 숀 코너리의 품격있는 모습에 얹어진 한 줄의 카피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임팩트 있게 메시지가 전달된다.
시간이 그저 흘러가 버리지 않고 위스키 안에 향과 맛으로 축적되는 것처럼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그냥 흐르기만 하는 세월은 없다. 새로움이 주는 가치가 있듯이, 시간을 쌓아야만 만들 수 있는 경륜의 가치가 따로 있다. 이것은 그저 흉내만으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뉴진스가 아무리 멋져도, 이효리를 대체할 수 없고, 천하의 이효리도 인순이의 아우라를 넘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90을 향해 가는 나이에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 긴 경험을 통해 따듯한 인술을 펼치는 노의사, 여전히 취재현장을 누비는 노기자의 모습이 미디어를 통해 비출때마다 존경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광고업계를 포함한 많은 영역에서 시간이 축적된 가치가 온전히 인정받으면 좋겠다.... 는 글을 진지하게 쓰는 걸 보니 나도 늙었나보다 나의 시간도 꽤 쌓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