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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Mar 30. 2023

세상에 바보가 많아 피곤하냐구?

에자이 쵸코라BB 드링크 TV광고(1992)


예전의 코미디에는 ‘바보’들이 많이 등장했다.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맹구’, ‘영구’ 같은 코미디의 주인공들이 이른바 바보 캐릭터들이다. 이런 레전드급 고전 코미디의 주인공들 외에도 코미디의 소재로 바보들이 곧잘 등장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은 왜 바보연기를 좋아했던 걸까. 어리숙한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에 사람들은 웃음보를 곧잘 터뜨렸다. 때로는 바보들이 가진 순수함이 잘난 사람들의 부끄럽고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 것 같다.


요즘엔 이런 종류의 코미디를 보기 힘들다. 시대가 달라졌다. 어딘가 부족한 행동을 보인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바보’라고 부르며 놀리는 것에 이제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약자를 희화화하지 않는 게 좋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이다. 좋은 변화다. 그런데, 그런 의식의 전환과 관계없이, 예전 스타일의 바보 연기에 쉽게 웃음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웃음의 코드가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




국어사전에서 바보를 찾으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첫 번째, 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지금까지 언급한 코미디의 주인공인 맹구나 영구를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정의는 이렇게 나온다.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 이 경우는 누구라도 해당될 수 있다. 관점이나 입장에 따라 누구나 그 명칭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대통령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다.


평소에도 흔히 쓴다.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이라고 욕할 때는 맹구나 영구 같은 생각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나와 생각이 다르면 '바보 같은 생각'이 된다.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것이다. 행동패턴이 달라도 바보가 된다. 가치관이 달라도 바보가 된다.


이런 종류의 바보들 때문에 세상사 복잡하다고 생각이 들 때 생각날 수 있는 카피가 있다.


世の中バカが多くて
疲れません?

세상에 바보가 많아서
피곤하지 않으세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 온에어된 쵸코라BB 드링크의 TV광고 카피다. ‘비타민 B2 배합’, ‘육체피로시 영양공급 및 자양강장’등의 자막을 보니 ‘비타500’류의 드링크제인 것 같다. 고수부지의 풀밭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여성이 갑자기 화면을 바라보면서 “세상에 바보들이 많아서 피곤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어보는 게 광고의 전부다.


동영상보기:


이 광고가 나오던 1990년대 초반 일본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얕아서 광고의 맥락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큰 화제가 된 광고인 것은 틀림없다. 이 카피가 <일본의 카피 베스트 500>이란 책에 일본 광고인들이 뽑은 전후 60년 베스트 100 카피로 선정되어 있다. 게다가, 이 카피가 일부 시청자들의 항의에 의해 사용금지가 됐다고하니 확실히 사회적으로 큰 반향이 있었던 것 같다.

'바보'라는 표현이 약자를 희화화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바보'라는 카피 자체에 불편한 심기로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보''똑똑한 사람'으로 바꿔 방영했단다. 이 소동을 두고 한 카피라이터는 ‘정말 바보들은 피곤하다’고 이 책에 촌평을 달았다.




사실 요즘은, 바보들 보다는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아 더 피곤한 세상이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어딜 가나 잘난 사람들 투성이다. 아는 것도 많고 구구절절옳은 입장을 설파한다.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반갑지 않은 충고와 비판이 날아 들어온다. 대단하다. 그런데 피곤하다.

그뿐인가. SNS마다 훌륭한 이들이 누리는 것들로 넘쳐난다. 아름답게 플레이팅 된 음식들, 멋진 로고의 옷과 가방, 빛나는 외제차 키가 난무한다. 멋지다. 그런데 피곤하다.  


이 광고의 2023년 버전이 나온다면 이런 카피가 되지 않았을까.

"세상에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피곤하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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