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규영 Aug 12. 2023

아저씨는 그렇게 배구덕후가 됐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신문광고(2010)

好きな選手がいるだけで、
人生は盛り上がる。

좋아하는 선수가 있는 것만으로
인생은 활기차진다.

- 요미우리자이언츠 신문광고 (2010) -



"뭐야? 뭐, 이렇게 재밌어?"


내가 배구에 푹 빠진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회사가 어려움을 겪으며 큰 스트레스를 받던 때다. 가족이나 직원들이 걱정할까 봐 속시원히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혼자 끙끙거리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무렵,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배구 직관을 추천하는 글을 읽게 된다. 직접 보면 그렇게 재미있단다.


'그래? 답답한데 기분전환 삼아 한번...'

얼마 후 가족과 함께 찾은 장충체육관에는 상상하지 못한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파워풀한 남자배구에 비해 여자배구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코 앞에서 펼쳐지는 빠르고 강력한 플레이는 잠시도 눈을 다른 곳에 둘 수 없을 만큼 흡입력이 강했다. 열정적으로 몸을 던지며 파이팅을 외치는 선수들의 모습은 자못 감동적이었다. 첫 직관에서 배구의 매력에 빠져버린 나는 바로 연간회원권을 구입했다. GS칼텍스 배구단의 홈구장인 장충체육관은 집과 회사의 딱 중간에 있었다. 가까워서 시작한 응원이었지만, 열렬한 팬이 됐다.


자주 경기를 보면서 각각 최애선수가 생겼다. 아들은 장난 많고 유쾌한 안혜진 선수를 좋아했다, 아내는 성실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이소영 선수의 팬이 됐다. 내 눈이 머문 는 등번호 6번, 세터 이고은 선수였다. 배구선수 치고는 작은 키로 펼치는 영리하면서도 헌신적인 플레이에 반해 버렸다. (지금은 팀을 옮겨 내가 응원하는 팀 소속은 아니지만 , 여전히 이고은 선수는 응원하고 있다. )


이미지출처: 더 스파이크, KBS뉴스


좋아하는 팀과 선수가 생기면서  생활의 변화가 시작됐다. 난생처음으로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샀다. 경기장을 찾아가 최애선수의 유니폼을 흔들며 응원하는 것은, TV앞에 앉아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줬다. 회사 일로 직관을 못 갈 때는 컴퓨터 모니터 창에 온라인 중계를 띄어 놓았다.


스마트폰을 열면 배구소식을 제일 먼저 찾아봤다. 팀이 이기거나 이고은 선수가 큰 활약을 한 날이면, 온라인 기사를 언론사별로 다 찾아 읽었다. 복잡한 배구의 룰과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글을 찾아보고, 책도 사서 읽었다.  


내 SNS채널에도 배구경기장에서 찍은 사진들이 자주 올라갔다. 팀과 선수의 SNS 채널을 팔로우하고, 팬 커뮤니티의 글을 읽으며 관련 정보와 지식을 쌓아갔다. 자연스럽게 다른 팬들과도 교류하면서 연대감은 더욱 커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배구직관을 가보라고 추천을 하며, 어느새 배구전도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다이어리에 표시해 둔 경기 일정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환기됐다. 좋아하는 팀과 선수의 존재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넘기는 힘이 되어줬다. 내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이런 내 상황과 심경을 찰떡같이 알아주는 광고 카피가 있다.


好きな選手がいるだけで、
人生は盛り上がる。

좋아하는 선수가 있는 것만으로
인생은 활기차진다.




盛り上がる(모리아가루)를 '활기차진다'라고만 옮겼지만, 이 단어에는 부풀어 오르는 뉘앙스가 있다. 활기를 넘어서, 흥이 나고 활력이 넘쳐서 인생이 풍성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충분히 그 뜻을 다 설명하지 못하는 내 실력이 아쉽다.   


아무튼, 이 문구는 2010년 프로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여성 팬들을 위해 만든 'Girl's Giants Seat'를 알리기 위해 만든 광고의 헤드라인이다. 이 인기 야구단은 도쿄돔에서 열리는 일부 홈경기 때 여성전용 좌석을 설치하고, 여성용 수납박스, 무릎담요, 여성용 메뉴 등 서비스를 제공했다. 여성에 최적화된 서비스로 여성팬들의 관심을 더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선수가 얼마나 삶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지 말해주는 카피로 광고를 만들었다. 여성 야구팬들 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팬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스포츠가 재미있어지는 제일 간단한 방법은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를 만드는 것이다. 룰도 모르고 지루했던 경기가 단번에 흥미로워진다. 특히, 좋아하는 선수가 생기면 생활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보는 뉴스가 달라진다. 보는 유튜브 채널이 달라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관련된 정보를 찾고, 공부까지 하게 된다. 몰랐던 사람들과 끈끈한 유대감을 공유하게 된다. 스타를 직접 찍기 위해 전문가용 카메라를 사기도 하고, 프로급의 편집이나 보정실력을 갖추기도 한다. 돈과 시간을 쏟는 만큼 애정은 더 커진다.


스포츠뿐만이 아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다. 아이돌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적 이슈가 될 만큼 대단했다. 요즘은 트로트 가수의 팬이 되면서 인생이 흥겹게 달라졌다고 고백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종종 TV에 소개된다. 평소 음악을 즐기고, 공연장을 찾는 것을 넘어서, 아이돌팬 못지않은 조직적인 팬클럽 활동까지 하는 분들도 많다.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건강을 되찾았다거나 인생이 달라졌다는 어르신들의 간증을 듣는다. 임영웅이나 송가인 같은 가수들이 실제 자식들보다 더 많은 효도를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늘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진한 성적으로 안타까움과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실망감을 주는 일도 생긴다. 그런데 진정한 팬이 된다는 것 좋아하는 팀이나 스타가 주는 빛나는 즐거움만 소비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그림자까지 끌어안고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일부가 되는 것이다. 단순한 구매자나 추종자가 되는 것을 넘어서는 일이 된다.


올해도 배구시즌은 10월에 시작한다. 찬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또 설레기 시작할 것이다. 좋아하는 팀, 좋아하는 선수와 써내려갈 내 인생의 한 페이지는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사무실 내 방에 걸려 있는 유니폼들. 이고은 선수가 팀을 여러 번 옮기는 바람에 여러 팀의 유니폼을 가지게 됐다.
2022년에는 업무차 이고은 선수를 직접 영접하고 인터뷰 촬영을 진행하는 행운을 누렸다. 성공한 인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스로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꼰대를 위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