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시대다. 꼰대의 대중화라고 해야할까? 한때 아저씨들이 독점했던 꼰대라는 단어를 모든 세대가 공유하고 있다. SNL코리아의 MZ오피스가 큰 인기를 끌며 ‘젊은 꼰대’를 화제로 만들었다. 젊은 꼰대들의 발흥으로 원조 꼰대들의 입지가 흔들리지만, 역시 꼰대의 오리지널리티는 아저씨들에 있다.
내가 학생이던 20세기에도 '꼰대'라는 말은 존재했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는, 선생님이나 아버지를 가리키는 은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원래부터,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 담긴 단어였다. 그런데, 학생시절의 나는 그 말을 입에 담아 본 적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쓰는 것을 들은 적도 없다. 1980년대에 서울 서남부권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낸 나에게 '꼰대'라는 말은 생활에서 살아있는 말이 아니었다. 글을 통해서나 어쩌다가 접하던 말이었다.
그랬던 이 '꼰대'라는 단어가 갑자기 주변에서 들리고, 일상생활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나무 위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90년대 즈음부터는 일상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낡은 은어쯤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략)...하지만 2000년대 들어 권위주의와 잔소리에 대한 반발의 의미가 강해지며, '그 아저씨는 완전 꼰대야' 처럼 지칭하는 상대의 특징을 잡아 비하하는 표현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특히 이 개념이 사회갈등으로 강하게 대두되기 시작한 2010년대 이후부터는 이 단어의 사용빈도가 늘어나고 다양한 부정적 의미로 확장되며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 되었다."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주름이 많다는 의미로 '번데기'의 방언 '꼰데기'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옛날 노인의 상징인 '곰방대'에서 왔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백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프랑스 Comte(콘테)를 그 유래로 설명한 글까지 나왔으나 속 시원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이제 '꼰대'는 연령과 상관없이 낡은 사고방식과 권위주의의 상징이 됐다는 점이다.
우리 70년대생들은 바로 그 권위주의에 대한 오래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소년기에 독재정권이 시민들의 힘 앞에 항복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회는 민주화가 일보 진전되면서 획일적인 전체주의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을 용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린 90년대에 20대를 보내며 개인의 선택과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향유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세대에 비해 진보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율이 훨씬 높은 편이다.
그러나, 그 70년대생들이 어느덧 40대를 거쳐 50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서태지를 따라서 '이제 그런 가르침은 이제 됐어!'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가 됐다. 이제는 '그런 가르침'을 늘어 놓는다고 비판받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스스로는 수평적이며 열린 가치관을 가진 멋진 선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리들만의 생각일 뿐이다. 후배세대들의 눈에는, 그 전에 앞서간 역사상의 모든 전세대들과 똑같은 '꼰대'일 뿐이다.
한가지 긍정적인 것은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노력하면 가능한 일이니까. 문제는 어떻게 노력하는가이다. 그런 우리 세대에게 '꼰대 근성 탈출법'에 힌트를 주는 카피가 있다.
その人生、 語れば説教。 書けば文学。
그 인생 말로 하면 설교 글로 쓰면 문학.
제 12회 도련님(坊っちゃん) 문학상의 포스터 문구다. 이 문학상은 소설 ‘도련님’의 배경으로 나온 마쓰야마(松山)시가 시 승격 100주년을 맞이하여 만든 것으로 도시의 문화적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 한다.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를 기념하는 문학상의 포스터답게, 횟수를 거치면서 멋진 카피들로 주목을 끌었다. 그 중 12회 공모를 알리는 카피는 2011 TCC(도쿄 카피라이터스 클럽) 카피연감에 등재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카피라이터 반도 히데키(板東英樹)씨는 그 해 도쿄 카피라이터스 클럽 심사위원장 상을 받았다.
이 포스터에는 담쟁이 넝쿨이 드리운 벽 위에 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살짝 뒤편으로 기대 오른팔에 머리를 댄 나쓰메 소세키의 유명한 사진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바로 그 포즈의 나쓰메 소세키의 일러스트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짧고 명료하게 라임을 맞춘 카피는 글쓰기의 장점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나이가 들면 확실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누군가의 작은 질문에도 거창한 대답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때로는 묻지도 않은 일을 먼저 나서서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척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뿌듯해하기도 한다. 역시 사람은 많은 경험을 해야 보는 것도 넓어지고 지혜로워진다, 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물론, 진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과 메시지도 꼰대의 설교가 되는 것을 막아주지 못한다. 윗 사람이 되어 존경 받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 카피는 조언해준다. 이럴 때 말 대신 글의 힘을 빌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우선 에세이로 써 보는 건 어떨까. 내 생각을 글로 쓰다보면, 좀 더 일목요연하게 생각이 정리되는 것을 발견한다. 내 경험담이나 옛날 일 자랑으로 빠지지 않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게 해준다. 때로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점까지 떠오르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배우는 점도 생긴다.
표현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소설이나 시를 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누구나 한 때는 문학소녀나 문학소년이던 시절이 있지 않은가. 문학적 향기를 담은 이야기는 상대방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열어준다.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는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성급한 꼰대식 설교가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까지 담은 멋진 작품이 될 수 있다.
혹여,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지도 모르겠다. 그건 말 대신 글로 하는 꼰대질 아니냐고. 물론, 그럴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꼰대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게 쉽지 않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생각이 정리되며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자신의 ‘꼰대성’을 발견하고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꼰대질이면 어떤가. 기왕에 하는 꼰대질, 좀 더 세련되고 멋있게 하는 것이 낫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