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영어를 배울 때 배우는 대표 문장들이 있었다. 모두 자기소개와 관련된 문장들이었다.
What is your name? : 이름. 중요하다. 불러야 한다.
Where are you from? : 출신. 출신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함축한다.
How old are you? : 나이. 외국에서도 많이 물어본다. 다만 우리나라처럼 관계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다.
Where do you live? 또는 What is your address? : 주소. 요즘같이 택배가 일상화되지 않은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주소는 신원을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장.
What is your hobby? 바로 취미다.
이름이나, 나이 같은 정보는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를 소개하는 필수적인 정보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취미는 그만큼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실제로 나머지 문장들은 어딜 가서든 사용할 일이 많았지만 what is your hobby? 는 수업 시간 외는 사용할 일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왜 취미가 저 다섯 문장 사이에 들어가 있는지 알게 됐다. 오히려 취미가 그 사람 자체의 본질적인 정보의 집약체라는 생각이 든다.
소개팅을 나가면 처음에는 기본적인 정보를 물어보고 나중에는 취미를 물어본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책을 좋아한다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를 물어본다. 호불호와 그 이유를 공유한다. 직장이나 나이, 출신은 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기본 정보라면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는 그 사람에 대해 깊게 알 게 해준다. 취미가 곧 취향의 집합체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사람 수에 맞는 취미를 하나씩 갖고 있다고 한다. 가령 혼자 있을 때는 책을 읽고, 둘이 있을 때는 테니스를 치고, 넷이 있을 때는 블루마블은 장난이고. 아무튼 사람 수에 어울리는 취미생활을 갖는다고 한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사람 수에 맞춰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져야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인만큼 에너지가 왕성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걸 배우고 싶은 욕구를 채워나가 보니 그게 취미가 됐을 것이다. 그렇게 얻은 취미에서 또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또 새로운 취미를 가졌으라.
흔히 부부가 공통 취미를 가지면 좋다고 한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면 아무래도 같이 보내는 시간도 많을 테고, 자연스럽게 대화거리도 추억거리도 많아진다. 일상 속에서 쌓이는 추억들은 결혼생활에 권태가 왔을 때 부부관계를 지탱할 수 있는 근간이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 부부는 0점이다. 공유하는 취미가 단 1도 없다.
성향도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내는 TV 보는 걸 좋아하고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아내의 SNS가 가장 큰 취미지만 나는 SNS를 하지 않는다. 아내의 주생활 공간은 거실이고 난 방에서 칩거 생활을 즐긴다. 아내는 환한 걸 좋아해 불을 켜 두지만 나는 어두운 걸 좋아해 불을 켜지 않는다. 아내는 방문을 닫는 걸 싫어하고 나는 방문이 열려있는 걸 싫어한다. 아내는 매일 먹고 싶은 게 있지만 나는 배만 채우면 된다. 아내는 한국 코미디 영화만 보고 나는 그것만 안 본다. 아내는 라디오를 들어야지만 잠에 들 수 있고 난 초침 소리에도 잠에 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각방을 쓴다.
이런 성향 차이로 인해 취미뿐만 아니라 특별히 대화를 많이 하지도 않는다. 우리 부부가 걱정되는가? 큰일 날 것 같은가? 그렇다면 내가 이 모든 걸 알고서도 기꺼이 결혼했다고 한다면 놀라운가?
나는 부부가 취미를 공유한다거나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는 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살며 아침저녁으로 뽀뽀하고 매일 식사를 함께 하고 가끔은 싸우지만 싸우는 횟수만큼 화해도 하며 무엇보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딸을 함께 키우는 것 자체가 세상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자 추억이다.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억지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그저 받아들여주고 이해해 주면 충분하다. 대화가 많진 않더라도 딸을 재우고 짧은 시간이나마 맥주 한잔하면서 서로의 눈을 마주 볼 수 있는 여유와 상대방이 할 말이 있을 때만큼은 귀를 기울여주는 자세가 있으면 된다. 대화가 반드시 말로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평소에 서로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잘 관찰하고 배려하는 게 최고의 대화가 될 수도 있다. 각방을 쓰더라도 새벽에 아기가 깨서 우는소리가 들리면 외면하지 않고 힘든 몸을 이끌고 남편을, 아내를 도와주러 갈 마음가짐이 취미를 공유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낮 동안에 각자의 일을 하느라 떨어져 있지만 일이 있든 없든 끊임없이 연락을 나누는 것처럼 같이 집에 있어도 서로의 공간과 시간을 보장해 주는 관계가 좋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되 그대를 하나하나 따로 있게 할지어다.' 칼릴 지브란의 시 '결혼에 대하여' 중.
중요한 건 취미와 대화가 아니라 마음이고 믿음이다.
이 글은 내게 골프를 배우라는 사람들이 부쩍 많이 생기면서 쓰기로 마음먹었다. 골프를 배우라거나 왜 배우지 않냐는 질문에 내 대답은 항상 같다.
"골프 배우면 아내와 같이 다녀야 할 거 같아서요. 아내가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 골프거든요. 저는 취미까지 아내와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내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웃는다. 누구는 농담인 줄 알고 누구는 격하게 공감이 돼서 웃는다. 간혹 웃지도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면 뭔가 측은한 동지애 같은 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