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아니, 그 한참 전부터 하던 생각이 있었다. 결혼할 상대를 만나면 꼭 해야 할 말이었다.
"내 부모님한테는 내가 잘할 테니, 네 부모님은 네가 잘해. 각자 부모님은 각자 알아서 잘 챙기자. 난 네가 내 부모님한테 잘하길 바라지 않으니까 너도 내가 네 부모님한테 잘하길 바라지 마. 명절에는 나는 내 집에 갈 테니 너는 네 집에 가."
결혼 후 실제로 그렇게 한 적은 없지만 난 진심이었다.
결혼할 때 자기 부모님한테 잘하는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남자들이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경험상 여자들도 만만찮다. 세상에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가 되길 바라는 사람은 널렸다.
내 생각은 배우자의 부모에게 잘하면 좋고 못해도 그만이다. 사위라고, 며느리라고 해서 특별히 더 잘해야 할 이유가 없다.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서 엄마가 이석증 수술을 했다. 한창 회사 생활이 바쁠 때라 주 중에 시간을 내기 힘들어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고 엄마를 찾아가기로 했다. 귀 수술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머리를 감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엄마는 머리를 감지 않은 채 지내고 있었다. 내 엄마가 수술했다고 해서 딱히 아내가 같이 가야 된다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아내가 같이 간다고 하면 오히려 엄마가 무리해서 머리를 감을 것 같아 아내에게는 나 혼자 가겠다고 했다. 아내는 두 말 없이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퇴근 시간이 다 돼서 갑자기 아내가 같이 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굳이 말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알겠다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는 장인어른, 장모님, 그리고 약속을 잡은 친구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수술을 했는데 당연히 찾아봬야 하는 건 아니냐면서. 장인어른은 아내가 우리 부모님을 잘 챙길 줄 모르는데 옆에서 이끌어주지 않아 서운하다고 말씀하셨다.
얼마 뒤 장모님이 수술을 하셔서 입원을 하셨는데 나는 매일 장모님을 찾아뵀다. 장담컨대 내 아내가 우리 엄마에게 같이 가지 않았더라도 나는 장모님을 병문안을 갔을 것이다.
아내는 나쁜 며느리고 나는 좋은 사위여서가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가족과 스스로가 수술하고 입원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몸소 터득했다. 입원한 장모님을 찾아간 건 아픈 사람이 진심으로 위로가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장모님이었기 때문에 간 게 아니라는 거다. 내 소중한 사람이 입원을 했다면 다 찾아갔을 것이다. 반면 아내는 본인이 수술도 입원도 해본 적이 없다. 가족 중에 수술을 하고 입원을 할 정도로 아픈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본인의 엄마(=장모님)가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음에도 매일 찾아뵙지 않았다. 본인 엄마도 안 찾아가는데 내가 왜 우리 엄마에게 같이 가길 바라야 하는가.
그렇다고 내가 효자고 와이프가 불효녀인가? 아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입체적이어서 특정 행동 하나, 말 하나로 누군가를 판단할 수 없다. 우리 아내는 딱히 소문나진 않았지만 사랑받는 딸이자 애정 받는 며느리다. 적어도 내 효심보다 아내의 효심이 더 크다는 건 내가 인정한다.
본인 부모님께는 각자 알아서 잘하자. 상대 부모님에게는 억지로 하지 말고, 마음 내키는 만큼만 하자. 배우자는 배우자의 '마음 내키는 만큼'을 받아들이자. 배우자로 인해 본인의 부모님 서운해하면 그건 본인이 메꾸자. 본인은 메꿀 생각 안 하고 배우자가 메꾸길 바라는 순간 누군가는 불행해진다.
결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부부고, 부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둘이 행복하게 재미있게 사랑하며 잘 지내는 것이다. 결혼과 부부생활은 부모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