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리님이 보내주신 자료 보고 있는데요, 이거 맞는 거예요?”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도 없이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내 귓구멍을 때리는 순간 나도 화부터 났지만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기로 한다. 팀 이동 후 처음 업무를 맡은 첫 달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만든 자료가 틀렸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가 아까 보내드린 자료 말씀하시는 거죠? 어디가 어떻게 틀렸을까요?”
“숫자가 내가 갖고 있는 거랑 하나도 안 맞아요. 어떤 자료 보고 만든 거예요?”
“제가 인수인계받은 대로 했는데 처음 해보는 거라 틀렸을 수도 있어요. 부장님이 갖고 계신 숫자 알려주시면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A 부장이 보내온 자료를 보니 내가 잘 못한 게 맞다. 하지만 큰 잘못이라고 보긴 힘들다. 마우스 클릭만 몇 번 하면 수정 가능하다. 얼굴도 모르는 이 아저씨가(=A 부장. 처음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아직 카운터 파트너들과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시기였다) 왜 이렇게 짜증을 내는지, 이게 이렇게 화낼 만한 일인지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A 부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열이 받지만 열심히 삭히고 있는데 그다음 A 부장의 말에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대리님. 숫자를 이렇게 이상하게 넣어서 주면 어떡하자는 거예요.”
“부장님. 틀렸으면 고치면 되지 이게 뭐라고 그렇게 짜증을 내요?”
“(움찔!) 뭐라고요?”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그가 움찔했음이 감지되는 듯하다.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시냐고요. 서로 크로스 체킹 하라고 여기엔 제가 있고 그 팀엔 부장님이 계신 거 아니에요?”
“아니...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대리님이 숫자를 잘 확인을 안 하고 준 거 같아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 사이의 시차가 그가 당황했음을 알려준다. 한 번 더 몰아붙였다..
“뭘 잘 못했는지 알겠으니까 제가 다시 해서 보내 드릴게요.”
“그.. 그래요. 그럼 확인하고 다시 연락 주세요.”
말을 더듬기까지 한다. 아니, 그 정도로 말을 더듬을 거면 애초에 뭘 믿고 그렇게 화를 냈지 생각하면서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 옆자리에 있던 선배가 슬쩍 물어본다.
“누구야? 무슨 일 있어?”
“A 부장님이요. 이 사람 말을 왜 이렇게 안 이쁘게 해요? 이 분 아세요?”
“아아. A 부장님. 그분 원래 말을 좀 그렇게 하드라.”
“별것도 아닌데 짜증 내고 지랄이야. 사람 짜증 나게.”
나중에 A 부장과 같은 본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A 부장은 평소에도 짜증 섞인 말투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2.
“대리님 이게 뭐예요. 제가 알려준 대로 하면 되지 무슨 미팅을 더 하고 싶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다짜고짜 짜증부터 내는 건지.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B 부장의 목소리에 이미 짜증이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데 참는다.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쪽이 인사 안 했으니까 나도 인사 안 할게) 뭐가요.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왜 임원 미팅을 요청하는 거예요?"
“그래요? 전 처음 듣는데요.”
그가 말하는 ‘임원 미팅 요청’은 정말로 금시초문이었다. 잠시 조용하더니 B 부장이 메일을 하나 보내왔다. 보아하니 실무자인 내가 빠진 채 우리 팀장이 임원 미팅을 요청하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이 메일에 제 이름 없는 거 안 보여요?) 아. 우리 상무님이 미팅 한번 하고 싶으신가 보네요.”
“그러니까 왜 만나고 싶어 하냐고요! 업무 처리 절차에 대해 다 안내드렸고 그대로 해서 결과만 우리에게 주면 되지 왜 만나냐고요!”
수화기 넘어 B 부장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거의 고함지르기 직전이다. 머리가 아프려고 그런다. 정말 난 들은 바가 없어서 모르겠으니까 우리 팀장님한테 직접 전화해서 물어봐요 하고 끊어버리려다가 문득 이 사람은 지금 본인의 화풀이를 위해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취급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B 부장이 나한테 준 대로 돌려주기로 한다. 내가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우리 상무님한테 부장님 쪽에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보고 드려요?”
“(엄청 놀라며) 네?”
“(목소리를 더 깐다) 실장님한테 그쪽 실장님이 보기 싫어한다고 말씀드려요?”
“(당황한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아니 그게 아니고... 실장님이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도 방금 부장님이 보낸 메일 보고 처음 알았어요.”
“혹시 아는 게 있는가 해서 물어본 거죠. 우리도 실장님한테 보고를 하려면 어떤 안건으로 어떤 내용으로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야 보고를 할거 아니에요.”
비겁한 변명이다. 실무자로서 몇 주 동안 같이 일을 해왔으니 우리 실장이 원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다. 자기 마음대로 일이 안 되는 상황에서 나한테 화풀이하려고 전화했는데 내가 받아치니까 아무 말이나 둘러 되는 거란 걸 안다. 행여나 그 부장 말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의 태도가 이미 나에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만들어버렸다.
“네, 알겠어요. 한 번 알아볼게요." 전화를 끊은 나는 우리 팀장에게 가서 B 부장이 임원 미팅 요청에 대해 문의 전화가 왔다가 말했더니 팀장이 내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B 부장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고자질하는 거 같아 그렇다고는 안 했지만 딱히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 걔 원래 좀 그래.” 알고 보니 B 부장은 평소 까칠하고 말 안 통하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B 부장과 한 번이라도 같이 일해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위급 기피 대상이었다.
3.
저 일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극찬을 날렸다. 그 부장들 때문에 평소에 애먹던 사람들은 통쾌해하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의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심했나?' 하는 일말의 죄책감을 드는데 조금은 도움이 됐다. 나를 막 대했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막 대했긴 했지만, 그 과정이 유쾌하지만은 않으니까. 하지만 참아서 두고두고 억울한 거보다 뱉어내고 잠시 자책하는 게 낫다. 억울함은 아주 강한 감정이라 두고두고 나를 괴롭히지만 죄책감은 비교적 약한 감정이라 금세 잊힌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못 잔다는 말은 항상 맞는 말이 아니다.
재밌는 건 저 일들이 있은 후에 두 부장님들이 나를 대하는 게 매우 조심스러워졌다는 거다. 가만히 있으면 막 대하고 지랄하면 잘해주는 그들의 태도가 씁쓸할 뿐이다.
4.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되고 싶지도 않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은' 한다. 말장난 같지만 착한 사람과 좋은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착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될 마음은 있지만 굳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마음도 능력도 없다.
내 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한테 좋은 사람이 될지 항상 선택해야 한다. 아무에게나 잘해주고 다니다가는 막상 소중한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을 때 에너지가 없어 마음과는 달리 막 대하거나 짜증까지 내는 병신 짓거리를 할 수도 있다. 미워해야 하는 사람을 배려하면서까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사랑을 줄이는 어리석은 행동은 더 이상 안 하기로 결심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쉽게 말하면 난 내가 잘해줄 사람과 아닌 사람, 친하게 지낼 사람과 아닌 사람을 가린다는 말이다. 그것도 극단적으로.
어릴 때부터 그랬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베풀었으며, 그게 아니면 무관심하거나 철저히 기피했다. 회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족, 친구, 회사 사람 등 어디에서 만났는지를 가리지 않고 비슷하게 사람을 대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선후배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했고 싫으면 최대한 피해 다녔다.
보통은 내가 피해 다니는 것만으로도 '나는 네랑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라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자기도 알아서 나를 무시하고 한다. 문제는 그중에서 나를 이겨먹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나는 당신이 싫고 말도 섞고 싶지 않고 최대한 서로가 서로에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메시지를 더 강하게 표현한다. 필요에 따라, 기분에 따라서는 싸가지 없는 행동도 불사한다.
A 부장, B 부장뿐만 아니라 지난 8년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싫어하는 선배와 싸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연차 차이가 10년 가까이 나는 선배랑 사람들 다 있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싸운 적도 있고, 3년 넘게 옆자리에 앉는 선배랑 헤어질 때까지 몇 개월 동안 인사도 안 하고 무시한 적도 있다. 후배들 막 대하는 건 기본, 술자리에 여자 후배들 불러서 자리 지키게 하고, 사람들 사이 이간질하고, 순한 후배들 불러다가 '너 회사 안에서 보내버리는 거 일도 아니야'라는 식으로 협박하기로 유명한 팀장과의 회식 술자리에서 그가 나에게 원샷을 강요할 때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도 있다.
본부 전체 인원 (30-40명)이 참석하는 회식이 있는 날, 팀 선배가 왜 이렇게 일을 더디게 하냐고 뭐라 했다. 평소에도 잘 가르쳐주지도 않고 일 시키고, 가르쳐 달라면 가르쳐주지 않았냐고 뭐라 해서 짜증 났는데 그날 결국 폭발했다. 오후 다섯 시에 핸드폰 끄고 컴퓨터 들고 잠수 타버렸다. 전화기를 켜보니 팀 사람들한테 어디 있냐는 연락이 쌓여있었다. 그날 회식자리에서 그 선배가 너무 갈궈서 내가 사라진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나중에 들어보니 나 말고 그 선배한테 그런 식으로 피해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5.
이런 욱하는 행동이 좋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틀렸었다고도 생각하진 않는다. 나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오랜 회사 생활 동안 깨달은 건 참으면 내 안에서 병이 되고 돌려주면 내 평판이 나빠질 수 있지만 평판이라는 건 어느 한 사건만으로 나빠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들이받지 않았는 게 후회된다.
싸우고 나니 사이가 더 좋아졌다는 말은 현실에서는, 특히 회사에서는 신화에 가까운 말이다. 내 경우는 결코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지 않았다. 다만 그 당사자들과 더 이상 관계가 악화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이미 사이가 틀어진 시점에서 싸웠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아서 사람들은 (나를 도와주진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욕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회사 생활이 특별히 더 불편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누가 누구랑 싸웠데' 할 정도로 갈등이 고조된 사람이 회사 생활 8년 중 10명 안팎이다. 회사 생활 내내 그런 갈등을 한 번도 겪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나를 열 받게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보통 이상으로 친하게 잘 지냈다.
'내가 특별히 잘 난 것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너네들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나도 충분히 선을 넘을 수 있고 그러면 나에게도 좋진 않겠지만 너한테도 그렇게 좋을 건 없어'라는 일관적인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내고 다니자 언제부턴가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는 '싫어하는 사람은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런 이미지로 피해를 보기보다는 오히려 회사 생활이 편해진 것 같기는 하다. 내가 일반적인 회사원들이랑은 '조금은' 다르게 선배들이랑 싸우고 다닌다는 점이 또래 선후배와 동기들에겐 다소 매력적으로, 때로는 대단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이미지가 나중에 내가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런 걸림돌은 전혀 문제가 안될 정도로 내가 잘난 게 아니다. 현실적으로 이미 내가 여러 선배들과 싸웠다는 것, 아니 애초에 그런 선배들의 행동을 참지 못할 정도로 짜증이 나는 사람이란 건 나는 회사형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다.
내가 들이받은 사람들은 나 말고 수 십, 수 백 명의 회사 사람들을 똑같이 대했을 텐데 나처럼 들이받은 사람은 아직까지 못 들어봤다. 다들 더럽고 치사하다고 욕하지만 어떻게든 참는다. 어쩌면 참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가 느낀 짜증의 크기와 그들이 느낀 짜증의 크기가 다를 수도 있다. 나보다 더 안 좋은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난 너만큼 짜증 나진 않는 거 같아. 대충 맞춰주면 돼."라는 말을 할 때 예전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결과론적으로 나는 절대 선을 넘는 인간들에게 맞춰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인물은 성격을 고치지 않는 이상 회사에서 결코 임원이 될 수 없다. 만약 나처럼 임원이 되지 못할 거 같다는 확신이 든다면 가끔은 정말 짜증 나는 사람 새끼가 있으면 싸가지 없게 행동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러나저러나 임원이 못 되는 건 똑같다.
게다가 아무리 꼬장이 하늘을 찌르는 인간들도 지위를 막론하고 대부분 우리와 같이 눈치 보며 살아가는 회사원들이다. 임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자리를 잃을까 봐 노심초사할 뿐만 아니라 잘못돼서 회사에서 잘리면 젊은 후배들보다 더 기회가 없다. 이상한 후배 잘 못 건드렸다가 일이 커지면 그들에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본인들도 잘 안다. 다만 내가 들이받으려고 하는 새끼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새끼'인지 '사람'인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 나한테는 겁나 쓰레긴데 나가면 겁나 신사처럼 행동하고 다니는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미 회사 생활이 충분히 좆같다면 가끔은 싸가지 없게 행동해도 회사 생활은 더 나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