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으로서 성공의 기준은 두 가지다. 임원 되기 또는 오래 다니기. (퇴사가 목표라고 말하는 회사원들이 심심찮게 있지만 말 그대로 그건 목표는 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해 회사원으로서 성공 기준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성공 기준 중에서 임원이 되는 옵션의 인기가 나날이 식어가고 있다. “나는 임원에 관심 없어.”라고 말하는 회사원들이 점점 늘어간다. 이는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말하곤 했다.
특히 요즘에는 회사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재테크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천정부지로 오름 집값, 반대로 바닥 모르고 떨어지는 금리 등 예전에는 월급 받아 절약하고 저축하고 살았으면 말년에 집 한 채 갖고 노후가 보장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월급 받는 회사원보다 집 있는 백수가 낫다는 사회가 돼버렸다.
임원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걸 포기하고 회사에 매진해야 한다. 재테크할 시간에 일해야 하고, 자기 계발할 시간에 술자리에 나가 사내 네트워킹을 해야 한다. 주말에는 애를 돌보고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포기하고 회사 사람들과 골프를 치러 나가야 한다. 그 과정도 너무 숨 막히는데 그렇게 임원이 된다 한들 임원 연봉으로도 쉽사리 집 한 채 살 수 없는 세상이 돼버렸으니 임원이 되는 인생의 가성비는 개똥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임원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임원이 되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지 시켜주는데 안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임원이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소중함을 외치며 기성세대와는 다른 인생을 추구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임원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될 각오와 태도로 회사 생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회사에 올인하지 않지만 임원 경쟁에서 영영 낙오되지 않기 위해 회사에서 줄타기를 한다. 지금 회사 임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임원 욕심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다 보니 할 수 있을 것 같아지고 그 가능성의 맛에 조금씩 정신이 팔려 회사에 영혼까지 바치는 사람이 됐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왜 저럴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임원 못 되면 어때, 회사 오래 다니는 게 장땡 아니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마다 ‘오래’의 개념은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자녀 대학교 학자금까지 받는 정도는 돼야 ‘회사 오래 잘 다녔다’ 말할 수 있다. 단언컨대 ‘임원이 못되고 회사를 오래 다닌다’는 그들의 생각은 회사 물정 모르는 안이한 생각이다.‘임원이 된다’의 반대말은 ‘임원이 못 된다’가 아니라 ‘회사를 오래 못 다닌다’이다. 사기업에서 임원이 안 되고 회사를 오래 다니는 건 임원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렵고, 만년 부장으로 정년을 채우는 사람은 그래서 전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원은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회사에서 임원이 되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조건은 네 가지가 있다.
업무능력, 야망, 체력, 운.
업무 능력은 보고서 작성 능력, 엑셀 능력, 외국어 능력 같은 실무 능력은 물론 아랫사람 관리 잘하고 윗사람 잘 챙기는 사내 정치력 등 스킬적인 측면 일체를 일컫는다. 저년차일수록 실무적 업무 능력이, 고년차일수록 관계적 업무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다만 자신의 업적은 부풀려 알리고 실수는 줄여서 무마시키는 능력은 연차 불문 중요하다.
야망은 누가 더 성공을 갈망하는가, 즉 성공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갈망의 정도는 ‘회사 외적인 것을 포기하는 정도’로 나타나는데 보통 '정규 업무 시간 외 투여하는 시간'과 비례한다. 야근, 회식 참여, 집에 다 왔는데 부르는 선배가 있으면 다시 돌아가는 열정, 윗사람들과의 점심/저녁 식사 자리를 즐기는 마음, 윗사람보다 빨리 출근하고 늦게 퇴근할 부지런함, 개인생활의 포기, 육아를 배우자에게 전가하고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포기할 각오(또는 무심함) 등이 야망을 표출하는 대표적인 자세들이다. 야망은 간접적으로 사내정치력과 관련이 있으며 업무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일수록 야망으로 부족한 업무 능력을 보완하고 회사에 대한 로열티를 어필한다,
업무능력이 중요하냐 야망이 중요하냐는 논쟁이 종종 있지만 나는 '같은 값이면 야망'이라고 본다. 가령 임원 자리가 하나뿐인데 업무의 신과 야망의 신이 붙는다면 아직까지 대기업에서는 야망이 큰 사람이 이기는 듯하다. 대기업 정도 되면 아무리 업무 능력이 뛰어나도 기업의 실적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기 힘들다. 즉, 업무 능력이 뛰어나도 고만고만하게 뛰어나다는 것이다.
다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애초에 업무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아무리 야망이 크더라도 임원까지 되기는 힘들다. 업무능력은 입사지원 과정에서 하는 서류 전형이나 소개팅에 나가기 전에 사진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 서류가 탈락하면 면접 기회도 없고, 사진이 별로면 만날 기회도 없듯이 업무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임원 후보군에 들어가기도 힘들다. 야망빨로 팀장까지 되는 사람은 있어도 임원까지 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체력은 회사를 건강하게 오래 다닐 힘이다. 다만, 그냥 오래 다니는 게 아니다. 20년 동안 새벽 출근과 야근을 병행할 수 있는 체력. 전날 아무리 술을 많이 먹어도 누구보다 일찍 출근할 수 있는 체력. 굳이 운동을 안 해도 아프지 않은 체력. 암과 같은 큰 질병에 걸리지 않을 체력. 주말에도 상사 또는 회사가 원한다면 등산과 골프도 나갈 수 있는 체력. 이 모든 걸 '큰 노력 없이' 해낼 수 있는 신체적 체력과 '즐길 줄 아는' 정신적 체력을 의미한다.
특히 선천적으로 잠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보다 하루를 더 길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잠을 적게 자면서도 온전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건 임원이 되기 위한 최고의 재능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마지막은 운이다. 위에 세 가지 조건들이 다 충족되는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 그러니까 업무능력, 야망, 체력 부문에서 모두 통과한 사람끼리 임원이 되기 위한 토너먼트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만났을 때 운이라는 게 작용한다. 운은 보통 시기의 문제와 겹친다. 자신이 임원을 달아야 할 때 회사의 실적이 좋은지 나쁜지, 회장 자녀 또는 회장 동생의 대학교 친구 또는 회장 누나의 사위 등이 갑자기 꽂히는지 스카우트되는지, 자신 위에 임원 대기 중인 선배가 얼마나 되는지 등등이 그 사람의 운이 된다. 보통 운은 될 사람을 조금 늦게 되게 하거나 조금 빨리 되게 만드는 정도로만 적용된다. 될 사람을 안 되게 하고 안 될 사람을 되게 하는 거의 없다.
회사 다니는 동안 봤던 임원들은, 또는 가나비(gonna be) 임원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실제로 실력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조건들을 모두 충족했으며 최소한 한 분야에 전문성이 있다고 ‘여겨지고',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그들의 가정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결코 그들처럼 하진 못하겠다 싶었다. 회사 생활을 위해 저녁과 가정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퇴근 후에 가족들과 시간을 갖고 싶었으며 그 시간 자체가 중요한 인생의 낙이자 목표였다.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돈을 벌고 싶었지, 돈을 벌기 위해 필요 이상의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난 야망 항목에서 미달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나도 처음에는 야망이 있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나도 임원이 될 거야 한건 아니었지만 임원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선은 넘지 않게 행동했으며 기회가 오면 기꺼이 그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회사 생활을 했다.
내가 결정적으로 임원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 건 바로 체력 때문이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잠이 많다. 고3 때도 시험기간이 아니면 밤 열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잤다. 잠이 부족한 날에는 단순히 졸리고 집중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몸에 통증이 생긴다. 안구건조증이 심화되고 목이 바짝바짝 타고 목과 어깨, 허리에 근육통이 생긴다. 그 외에도 회사 생활 4년 만에 목 디스크가 왔고, 그로부터 2년 뒤에 허리 디스크가 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상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체력적으로 난 글렀다는 생각이 확신이 될 즈음 고등학교 때 큰 외삼촌이 나와 사촌동생들을 불러 모아 앉혀놓고 해준 말이 떠올랐다.
“지금 누가 대학교를 잘 가고 너무 기뻐할 거 없고, 누가 대학교를 못 간다고 해서 너무 좌절할 것도 없다. 앞으로 너네 인생에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고, 더 많은 실패가 있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 절대 공부 하나에 목숨 걸지 말아라. 다만 반드시 하나 지켜야 할 게 있다. 건강. 건강하면 아무리 크게 실패해도 일어날 수 있지만 건강을 잃으면 갖고 있는 것들도 다 무의미해진다.”
대기업에서 임원은 통계적으로 백 명당 한 명이라고 한다. 그 한 명은 어느 날 갑자기 군계일학처럼 띡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라 20여 년을 거쳐 만들어진다. 뛰어난 순으로 줄을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20년 동안 임원이 되기 힘든 '주홍 글씨'가 없는 사람이 살아남는 구조다. 난 입사 7년 만에 내가 임원 후보군에서 영구 제명됐음을 인정했다. 승진 누락 후보자가 된 해 동기들은 발탁으로 과장이 됐으며 육아휴직으로 2년 동안 승진이 누락되어 나보다 몇 년 늦게 입사한 후배들이 나보다 먼저 승진했다.
속단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니냐, 돌아가서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다고 그랬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열에 아홉은 잘 될 줄 알았던 사람이 못 되는 경우에 적용되지, 안 될 줄 알았던 사람이 잘 되는 경우에 적용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처진 나의 페이스를 끌어올리는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앞으로 최소 몇 년 동안 가족이고 딸이고 내 인생이고 다 포기하고 회사에 올인하면 된다. 매일 야근하고 매일 임원/팀장이랑 점심 먹으며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임원/팀장들이랑 저녁에 술 한잔하면 된다. 지금 나보다 2-3년 앞서가는 동기들과 후배들, 아니 지금 임원과 팀장이 된 사람들이 살아남은 방법이기도 하다. 특별히 대단할 것 없는 나는 그 노력을 조금 더 오래, 정확히 말하면 내가 뒤처진 세월과 꾸준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동기 및 후배들과의 격차를 따라잡을 정도 하면 된다. 모든 걸 포기한다면 그래도 5년 정도 하면 그들과 최소한 동일선상에 다시 설 수 있지 않을까. 운이 좋으면 오히려 앞서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그건 내가 바라 왔던 삶도 아니었고,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하고 싶어도 내 몸과 정신이 버티지 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몸이 병나거나 정신이 돌아버리거나 둘 중 하나는 분명 발생할 것이다.
회사 비슷한 연차의 사람들을 만나 임원이 못 될 것 같아서 퇴사하기로 했다고 하면 "네가 그렇게 임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몰랐네. 임원에 대해 별로 욕심 없는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다. 임원이 될 생각이 없다와 될 수 없다는 엄연히 다르다. 엄밀히 말하면 임원이 되지 못할 게 확실한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회사를 다닐지, 더 나아가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내가 나이가 좀 더 있고 연차도 직급도 지금보다 높아 임원이 되기 글렀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든 이 회사에서 연명하는 게 최선인 상황이라면 닥치고 회사에 붙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상황도 아니다. 비록 가정이 있고 아이들이 있지만 그 때문에 이 회사를 다닐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건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이고 내 자식들을 현실과 타협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난 아직 젊고 앞으로 일을 하고 살아야 할 기간이 지금까지 일을 해온 세월보다 길다. 이 상황에서 좋게 좋게 회사를 다닌 다는 건 최선을 다해 살아온 과거에 대한 배반이고 여전히 한창인 내 젊음의 낭비다.
특별히 임원이 인생의 목표였다 거나 애사심이 큰 스타일은 아니어서 그다지 지금의 상황이 불행하진 않다(물론 그 과정에서 회사에,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많이 괴로웠다).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라 딱히 현재를 온전히 즐기지도 못한다. 그저 이제껏 회사를 대충 다녔다는 점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원래는 회사에서 욕심을 부릴지 말지에 대한 결단을 조금 더 이후에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많은 나이 들고 연차 높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아직 그런 결단을 내리기엔 어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예상보다 이른 나이에 그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고,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그 결단을 기회로 만들지 후회로 만들지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