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팀에 신입이 들어온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입사한 해를 빼고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팀에 신입이 들어왔다. 신입이 아니더라도 팀에 항상 후배가 있었으니, 신입사원 이후 막내였던 적이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신입 채용 과정에서 면접관으로 초청(?) 받았는데 올해는 결과만 통보받았다. 육아휴직에서 복직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랬을까.
잘 됐다. 이제껏 봤던 모든 면접자들에게 항상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줬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래 알아왔고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마음이 여리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면접관이 되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탈락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합격시키든 탈락시키든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순간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고 싶지 않다. 면접관을 해야 한다면 줄 수 있는 최고의 점수를 주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어쩌면 이제까지 면접에서 변별력 없는 점수를 줘서 면접관으로 초대받지 못한지도 모르겠다(아니면 내가 높은 점수를 준 애가 입사해서 개판을 쳤을지도...!!).
내년에 새로운 사람이 팀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문득 이제까지 만나왔던 신입들에게 했던 말들을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신입이 들어올 때마다 '여기 앉아봐. 지금부터 내가 해줄 말이 있어. 잘 들어.' 하고 한 번에 모든 말을 해준 건 아니다. 이제까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때그때 했던 말들을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봤다.)
1. 거절이 편한 사이
"우리 서로 거절이 편한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회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사이는 거절이 편한 사이예요. 제가 무슨 제안을 할 때 조금이라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부담 갖지 말고 거절해 주세요.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해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주세요. 반대로 저한테 제안하거나 부탁할 일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말해줘요. 어차피 다 들어줄 거 아니고 거절할 건 거절할 거니까."
2. 신입사원의 본분 : 놀기
"신입은 무조건 놀어야 합니다. 신입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의무는 신나게 많이 노는 겁니다. 회사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올해는 많이 놀아요. 돈도 펑펑 써보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올해, 내년 길면 내후년까지. 나중에는 지금처럼 놀 수 없어요."
3. 3년차가 끝나면 퇴사한다고 생각하세요.
"3년 뒤에 퇴사한다고 생각하고 뭐라도 준비해 봐요. 공부가 적성을 맞는다면 전문직에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꼭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이직이나 사업의 기회도 쉬지 않고 찾아보세요. 의식적으로 이 회사를 오래 다닐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이 회사에서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3년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그때 퇴사해서 뭘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그 뭔가를 고민해 보세요."
4. 회사는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3년 뒤에 퇴사하라는 이유가 회사는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회사는 우리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퇴사해서 개인 사업을 하라'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본인들이 그렇게 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무책임함 자체가 저는 싫어요. 그들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천년만년 이 회사 다닐 거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쫓겨나는 모습도, 그렇게 아랫사람들한테 책임감이니 프로의식이니 강요하다가 막상 본인이 갈 때는 몇 년 동안 자신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에게 고생했다는 말, 인사 한 마디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도 많이 봤으니까. 하지만 원래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아요. 우리 부모님도 우리 미래를 책임져주지 못해요. 우리 배우자도 우리 미래를 책임져주지 않아요. 근데 회사는 적어도 우리 현재를 책임져주잖아요? 월급으로."
5. 그렇다면 퇴사하라는 이유는.
"3년 뒤에 퇴사하라는 이유는 그즈음부터 아마 새롭게 배우는 것 없이 3년 동안 배운 여러 가지 능력을 바탕으로 반복적으로 일을 하게 될 거예요. 팀이 바뀌면 새로운 일을 새로운 사람들과 할 수 있겠지만 뭔가 내가 성장하는 느낌을 받긴 힘들 거예요.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그만큼 회사에 잘 적응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됐다는 뜻일 테니까. 3년이 지났는데도 막 업무에 허덕이고 있으면 그게 더 슬플 수도 있어요. 아무튼 회사에 잘 적응한 만큼 급격하게 회사 생활이 재미 없어지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돼요. 다른 재밌는 걸 찾아보게 되는데 그때부터 찾으려고 하면 이미 너무 깊게 발을 들인 거 같아서 잘 엄두가 나지 않거든요. 딱히 개인적으로 간절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귀찮기도 하고요. 적응할 대로 적응한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게 돼요."
6. 회사에서 가장 나쁜 사람.
"우린 그냥 회사에서 만난 사이니까 '비즈니스적' 인간관계를 유지하면 좋겠어요.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할 일 잘해서 서로 피해 주지 않는 정도의 프로페셔널한 인간관계. 정말 정신병자 거나 악의에 가득 찬 사람(회사엔 은근히 그런 사람이 많아요)이 아니라면 회사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남에게 피해 주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각자의 일을 잘하다가 좋은 인연이 되면 그 이상으로 친해지고 인간적인 유대감을 만들 수 있는 건데 제가 10년 넘게 회사 생활하면서 저한테 그런 사람은 많아야 4-5명이에요. 잠깐잠깐 친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대부분은 그때뿐이었어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저와의 관계를 말하는 거예요."
7. 네 월급은 내가 주는 게 아니다. 내 월급도 네가 주는 게 아니다.
"저한테 잘 보이려고 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제가 평가권자도 아니고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일만 잘하면 출근을 하든 말든 집에 일찍 가든 말든 전 상관하지 않을게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저랑은 '내가 후배니까 희생해야 돼', '선배한테는 더 잘해줘야 해' 이런 거 없기로 해요. 대신 저한테도 '선배답게 행동하세요' 이런 건 없었으면 좋겠어요. 각자 자기 건 자기가 알아서 챙기기. 그 외는 서로 바라지 않기. 그대가 이 회사의 주인이 아닌 만큼 저 또한 이 회사의 주인이 아닙니다."
8. 사장은 사장답게, 팀장은 팀장답게, 신입은 신입답게.
"연차라는 걸 무시할 순 없죠. 사장이 나보고 사장답게 일하라고 하면 말이 안 되듯이 신입이 저처럼 일하길 바라지 않아요. 저처럼 일하면 저보다 월급 더 많이 받아야죠. 우리 회사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만큼 조직에서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일이 많다고 해서 제 일을 신입한테 시키지 않습니다. 제가 일이 없다고 해서 신입이 해야 할 일을 해줄 생각도 없어요. 전 일을 시킬 때 항상 그걸 염두에 두고 일을 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업무 난이도나 업무량을 정확히 조절할 순 없으니 만약 어려우면 언제든지 저에게 말해요. 반대로 제가 선배로서 해줘야 하는 일이 있다면 말해줘요.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요. 초반에는 제가 어렵거나 도와줄 일 없냐고 물어보긴 하겠지만 언제까지고 따라다니면서 물어볼 순 없으니까요."
9. 필요한 건 이미 회사에 다 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저한테 물어보고 시작해요. 앞으로 회사 생활을 계속한다면 기억하세요.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반드시 누군가가 먼저 했고, 관련 자료가 회사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회사 생활을 잘하는데 수많은 능력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어디에 필요한 정보가 있고 그 정보를 얻어내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신입인 만큼 아직 그런 능력은 없을 테니 무조건 저한테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하는데 관련된 자료가 있냐고 꼭 물어보세요."
10. 무식은 신입의 특권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적어도 1년 동안은 똑같은 질문을 백번 해도 절대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똑같은 질문을 하는 이유는 제가 설명을 잘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제가 설명해 줬는데 다시 물어보는 거에 대해서 절대 부담 갖지 마세요. (그렇다고 진짜로 똑같은 질문 백 번 하진 말고...)"
11.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제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은 오직 저와의 관계에서만 적용된다는 걸 절대 잊으면 안 돼요. 회사에서 다른 선배들을 대할 때 저를 대하는 것처럼 하면 절대 안 돼요. 저는 극단적으로 회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업무만 잘하고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그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냥 회사에서 일 말고는 어떠한 것들과도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기 때문에 제가 말하고 행동하는 건 따라 하지도 마요. 최소한 저랑은 서로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받지 말자는 차원에서 한 말들이었고 저한테 잘 보이려고 고민할 시간에 다른 선배들한테 잘 보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12. 번외 : 재테크는 적금으로.
"적금 풍차 돌리기를 추천합니다. 요새 예적금은 답 없다고 하지만 안 쓰고 모으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어요. 특히 종잣돈이 없으면 더더욱 적금이 최곱니다. 저는 아직도 적금을 들어요. 혹시 그래도 적금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면 적금한다고 생각하고 매월 월급날 20-30만 원으로 우량주를 사요. 적금한다는 생각으로. 신입 때는 일단 무조건 '닥모', 닥치고 모아야 합니다."
글로 써놓고 보니 뭔가 씨가지 없게 들렸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내용도 있는 것 같지만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후배들과는 매우 잘 지내고 있다. 나를 좋아한다고 감히 장담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나를 싫어하는 후배들은 없을 것 같다. 가끔 날 너무 편하게 대하는 후배들도 종종 있는데 그 마음은 고맙지만 그 후배들은 내가 멀리하게 된다. 그런 후배들은 웬만한 진상 선배들보다 불편하다.
다른 이야기지만 나를 어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선배는 종종 있다. 선배들한테는 말로 표현만 안 했지 후배들한테 했던 말 그대로 선배들(임원, 팀장 포함)을 대하기 때문에 장유유서와 연공제를 중시하(고 자기를 떠받들어주기 원하)는 선배들은 나를 싫어한다. 하지만 그런 선배들 몇 명 빼고는 (역시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선배들과도 대체로 잘 지낸다. 오히려 나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낀다며 더 좋아해 주는 선배들도 적지 않다.
아마 내년에 들어오는 신입한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연차 차이도 많이 나는 데다가 팀에 2-3년 차 주니어들이 있어서 아마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나와는 업무 외로는 직접 대화를 나눌 일도 별로 없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내가 업무 외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처가(또는 시댁)와 선배는 가까워서 좋을 게 없는 법. 후배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왔다. 내가 예전에 받았던 기분 나쁘고 쓸데없는 질문을 하기는커녕 업무 외적으로는 말조차도 잘 걸지 않았다.
문득 이게 과연 저들에게 마냥 좋은 걸까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후배님, 넌 선배가 먼저 연락 안 하면 연락이 없냐?" 하며 10년 전 함께 했던 선배들이 핀잔주듯이 연락 줄 때가 그렇다. 지금 후배들이 좋다. 그들과의 적당한 거리도 좋다. 다만 내가 이 팀을 나가거나, 그들이 이 팀을 나간다면 업무로 연락할 일 없으면 굳이 연락을 할 것 같지 않다. 후배들도 당연히 나한테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 힘든 게 편한 사람이 것이고 그거보다 더 힘든 게 연락을 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래된 친구들보다 더 자주 연락 주는 선배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 보니 한편으론 나도 이제는 짬이 좀 찼구나 싶고, 다른 한편으론 지금보다 더 의식적으로 후배에게 예의를 갖춰야겠다 싶다. (그렇다고 절대 선배한테 연락하진 않을 듯...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