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내가 신입일 때. 그러니까 거의 십 년 전. 아직 '퇴사'라는 게 지금처럼 공론화되고 열풍이 되어 우리 사회를 휩쓸기 전. 지금처럼 퇴사 퇴사 노래하진 않았지만 그때도 역시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싫어하고 회사를 관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 또한 그랬다.
친한 동기에게 열심히 합리와는 거리가 먼 회사 문화와 배울 거라곤 하나 없는 선배 욕을 한창 하고 있었다. 곰곰이 듣고 있던 동기가 말했다.
"근데 네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는데 난 사실 만약에 지금 회사를 다니고 있지 않다면 내가 뭘 하고 있었을까 상상이 안돼. 내가 어디 가서 이렇게 일을 하고 매일 공짜 점심을 얻어먹고 그러겠어."
동의를 하진 않을지언정 웬만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는 하는 나였지만 당시 26살이었던 나는 동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는 거지? 자신감이 없는 건가?'
얼마 전.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두 번째 육아휴직에서 복직을 하고 난 후. 무심코 사무실 밖 풍경을 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회사를 다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하늘과 가까운 사무실에서 일해볼 수 있었을까?'
그 풍경뿐만 아니라 회사를 다니면서 누린 많은 것들. 가령 내 돈으로는 먹어보지 못했을 비싸고 맛있는 음식과 술. 작고 귀엽지만 그래도 매달 꼬박꼬박 꽂히는 소중한 마약, 아니 월급. 있어도 안 먹지만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는 공짜 음료수와 간식들. 일하다 힘들 때면 회사 사람들과 나가서 법카로 마실 수 있는 커피. 그리고 이제까지 수도 없이 만끽한 사무실 주변의 산책 명소들. 이 회사를 다니지 않았다면 해보지 못했을 경험들에 전에 없던 감사한 마음이 물씬 들었다.
복직하고 나서 딱히 바쁘지 않고 일이 없어 재택을 할 수 있는 날(위드코로나 전 재택이 권장되던 시기였다)에도 매일 출근했다. 복직하고 얼마 안 돼서 일이 없기에 출근으로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것도 분명 있지만(일이 있으면 재택을 해도 눈치가 보이지 않지만 일이 없는데 재택을 하면 그건 그냥 집에서 노는 거가 되니까) 집보다 회사가 사실 더 편하다. 집에 있으면 애 보랴 와이프가 시키는 일 하랴 점심 걱정하랴 회사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내 시간'이 없다. 실제로 얼마 전 결혼기념일 휴가를 보일러 수리, 세탁기 이동 같은 집안일하는 데만 쓰지 않았던가. 이제는 휴가도 휴가가 아니고 휴일도 휴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회사에서는 내가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
'20대에 좌파가 아니면 심장이 없고 40대에 여전히 좌파면 뇌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상황이 바뀌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회사 가기 싫어했던 내가 이제는 회사가 더 편하다니.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다소 복잡한 본질이 그 이면에 있다.
최근 유독 '과연 나는 그동안 내가 욕하던 선배들보다 더 나은 선배가 되어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내가 처음 입사했을 당시 우리 팀은 팀장을 제외한 팀원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연차가 대략 10년 플러스마이너스 1~2년 되는 부류가 있었고 연차가 1~3년 되는 나머지 부류가 있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 저년차들이 그때 선배들의 연차가 되었다. 내가 막상 선배들의 나이가 되어보니 당시에 선배들이 얼마나 어렸는지, 우리 앞에서는 당당한 척했지만 사실 본인들도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나빴던 게 아니라 그들도 잘 모르고 미숙했던 게 아닐까 이해하게 된다*. 무엇보다 어떻게 그렇게 일을 열심히, 그리고 잘 했는지 혀를 내두르게 된다. 지금 나한테 당시 선배들이 하던 대로 일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들은 어른이었는데 같은 나이와 연차가 된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느낌이랄까.
(*) 물론 재고의 여지 없이 그냥 나빴던 선배들도 많았다.
이 회사에 계속 남아 십 년 뒤, 이십 년 뒤의 내 모습이 선배들의 모습이라면,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기에 반드시 퇴사해야겠다 다짐하던 신입사원이 이제는 당시의 선배들을 재평가하는 아재가 된 내 모습을 보니 문득 '나도 그저 그런 사람이 되었구나'하며 씁쓸해졌다.
복직하고 나서 며칠 후 작년 입사한 후배, 그러니까 올해 2년 차인 후배와의 점심 식사 자리였다.
"작년에 저 일주일 휴가 갔을 때 선배님이 휴가 마지막 날 저녁에 저한테 문자해 주셨던 거 기억나세요? 선배님이 신입사원 때 휴가 길게 간 적이 있는데 휴가가 끝나갈수록 괜히 걱정이 됐다고. 그래서 저한테 제가 휴가 간 기간 동안 회사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휴가 마지막 날 밤 푹 쉬고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내일 출근하라고 문자 주셨었어요."
후배가 경고등도 없이 훅 들어왔긴 했지만 후배의 말에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그랬다고? 내가 그런 문자를 보냈었다고?"
단순히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그런 문자를 보내는 다정한(?)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네. 그 문자 보고 진짜 마지막 날 걱정이 싹 없어졌었거든요. 선배님 육아휴직 가 있는 동안에 유독 그 때 문자 주셨던 게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와... 내가 그랬었구나...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할 거 같은데... 작년에 나 좀 괜찮았던 사람이었구나..."
점점 '그저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많진 않더라도 딱 '아무 일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문자해줄 수 있는 따듯한 마음은 간직하고 싶다. 그래봤자 '마음 따뜻한 그저 그런 사람'이겠지만 그게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