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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Apr 18. 2021

좋아하는 일, 해야 하는 일, 잘하는 일

육아 휴직하고 집에 있어보니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를 다닐 때는 매일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 한 시간, 집에서 회사까지 통근 시간 한 시간,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 회사에서 머무는 시간 아홉 시간, 야근을 하거나 회식을 하게 되면 추가적으로 서너 시간을 더 보낸다고 하면 하루 최소 열한 시간에서 최대 열다섯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게 된다. 회사를 다닐 때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는데 집에 있어보니 이 열몇 시간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이라는 걸 느꼈다. 회사를 관두고 이 시간을 잘 사용하면 뭘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육아 휴직하고 시간이 좀 흐르면서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내가 받던 월급이 결코 작지 않은 돈이라는 것이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회사원의 인생이 얼마나 편한 지도 깨달았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은 내가 만들어내는 실적의 대가가 아니라 내 인생의 기회비용이라는 말처럼 월급은 회사에 출근하고 자리만 지켜도 나온다. 막말로 출근해서 하루 종일 똥만 싸도 회사가 망하거나 내가 '잘리지 않으면' 월급은 나온다. 


육아휴직 전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박히는 월급에 감사한 마음보다는 불만이 더 많을 때 '내 인생의 기회비용'이 과소평가되는 게 아닌가 의문을 종종 갖곤 했다. 회사원이 되지 않고 다른 길을 갔다면 훨씬 더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수입이 없어지고, 사업도 해보고, 글쓰기도 해보고 나니 '월급이 내 실적의 대가가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절감했다. 아무리 회사 생활이 더럽고 힘들어도 퇴사하지 않고 버티면 매월 통장에 꽂히는 월급이 '한 달에 한 번 꽂히는 마약'이라는 말에 비로소 실감했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둥, 회사는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다는 둥 회사원의 삶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누가 뭐라 해도 가성비 측면에서 회사원은 나쁘지 않은 직업이다. 큰 보상은 없지만, 큰 책임도 리스크도 없다. 어쩌다가 잘 풀려서 임원이 되면 그 보상도 결코 작지 않다. 회사 생활이 적성에 맞는다면 굳이 회사 밖에 나가 고생할 이유가 없다.  

 

난 회사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지만 그 가성비의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회사원을 때려치운다고 하더라도 돈 벌어먹고 살 자신은 있었다. 젊고 힘이 있을 동안에는 회사 다닐 때 보다 더 많은 돈을 벌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위해 바쳐야 할 시간과 실패할 경우 나와 우리 가족이 짊어져야 할 리스크 등을 따져보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더 잘 살기 위해 하는 퇴사가 오히려 내 삶에 불행을 한 숟갈 더 붓는 계기가 되지 않게 할 각오가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애들이 커서 나보다는 친구를 찾기 전까지의 한정된 시간 동안은 애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중에는 같이 지내고 싶어도 나랑 놀아주지 않을 테니까, 나랑 놀아줄 수밖에 없을 때 우리 딸들이랑 많이 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너무나 회사에 돌아가기 싫었지만 월급 외에 모든 기대감을 내려놓고, '나는 아홉 시에 출근해서 여섯 시에 퇴근하는 월급 받는 기계다' 주문을 외며 복직을 선택했다.


하지만 막상 회사를 다녀보니 너무 재미가 없다. 누군 재미로 회사 다니냐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심각하게 재미가 없다. 하는 일도 재미가 없고 보람도 못 느낀다. 윗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걸 즐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윗사람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데서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 인정해 주면 고맙지만 인정 안 해줘도 그만이다. 특히 오로지 나보다 먼저 회사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생긴 그들의 평가권은 나에겐 크게 의미가 없다. 심지어 그들이 내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 회사에서 내 미래가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것도 재미가 없는 큰 이유 중 하나다. 과장 진급을 2년이나 누락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특별하게 눈밖에 나지 않으면 진급을 시켜주는 문화가 강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웬만하면 1년 진급 누락하기도 힘든데 나는 그걸(=진급 누락) 무려 2년이나 했다. 내 2-3년 후배들이 나보다 먼저 진급해버렸고 조기 진급한 내 동기들은 나보다 3-4년을 앞서가고 있다. 그들 중에서는 회사에서 해외 MBA를 보내준 사람들도 적지 않고, 회장/부회장/사장 비서직을 다 꿰차고 있다. 그런 기회와 자리를 굳이 바라지도 않으며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그 격차를 봐야 하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 서두에서 회사원의 월급이 가성비가 좋다고 침 튀기며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가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꽂아주는 구조를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회사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자신의 모든 인생을 회사에 갈아 넣는 사람들, 회사를 인생의 첫 번째 옵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월급을 시급으로 환산하면 법정 최저시급보다 낮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도 안 되고, 따라 하고 싶지도 않고, 부럽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그들의 노력의 크기만은 충분히 인정한다. 


조용히 월급이나 받아먹자고 마음먹었는데, 내 인생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어중간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내가 망가져있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도 생겼다.


20대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30대엔 해야 할 일을 하고, 40대 이후부터는 잘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성공하여 부와 명예를 누리고 싶어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40대부터 50대까지가 가장 많이 일하고, 성취하고, 빛을 보는 시기다. 우리 커리어 전성기는 40대에서 50대 사이에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20대, 30대 때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고 40살부터는 본격적으로 잘하는 일에 집중해야지만 성공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30대가 끝날 때까지 잘하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 취미가 직업이 된다는 말처럼 하고 싶고 재밌는 일을 쭈욱 하다 보니 잘하는 일이 되어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해야 돼서 했던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쟁력을 갖추거나 전문성이 생기기만 해도 더 바랄 게 없다.

 

나는 26살 때부터 취직해서 일을 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양심 없이 지금 와서 억울하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 할 생각은 없다. 사실 나는 살아오면서 딱히 좋아하거나 재미있어하는 일도 별로 없었고 지금도 별로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지 않을까 싶다. 젊을 때는 난 왜 좋아하는 일이 없을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걸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그냥 업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일이 생기는 성향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을 앞으로 5년 동안 해서 내가 40대를 맞이했을 때 잘하는 일이 되어 있을까 생각해 보니 도저히 그렇게 될 거 같지가 않다. 무슨 일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일을 함에 있어서 나의 마음가짐의 문제다. 너무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어서 열심히 하려 해도 열심히 할 이유가 없다. 대충 해도 동료들과 오랫동안 회사가 만들어온 시스템 덕에 회사에 손해를 끼치기도 쉽지 않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저 아무 일 없기 만을 바라는 내 모습에서 미래에 대한 위기감을 떠나 이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게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군가(대표적 인물 : 우리 엄마)는 내 고민을 배부른 소리라고 하지만, 단언컨대 이게 배부른 소리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안다. 어찌 됐든 간에 지금 회사 덕에 아내를 만나 두 딸의 아빠가 돼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살고 있는 거니까. 아무리 회사가 싫더라도 내가 누린 혜택들이 결코 작은 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회사를 다닐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가며 출근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고민을 멈추는 순간 인생은 거기서 정체해되기 때문에 항상 공부하고 회사에 침몰되어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아가지 말라는 누군가(대표적 인물 : 이것도 우리 엄마)도 있다.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회사원을 때려치울 용기도 대책도 없으니 당분간은 부업과 재테크에 집중하고 회사는 월급을 받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상도를 지키며 다닐 계획이다. 다만 지금 회사는 인생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가 없으니 다른 회사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오랜만에 링크드인에서 헤드헌터들한테 무작위 1촌 신청 날리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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