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를정한일 Dec 31. 2021

최고의 리더는 없어도 되는 리더다

연말을 앞두고 팀원들과 올해 한 일과 내년에 할 일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한 각자의 소회와 내년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누던 중이었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일할 줄만 알았어요. 막상 들어와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이렇게 허술할지 몰랐어요. 근데 신기한 건 그렇게 해도 일이 어떻게든 진행이 돼요."


작년에 입사한 후배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고 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직장인들이 처음 입사하면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한다고?! 그런데 일이 진행이 된다고?!'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서 저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진 않지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항상' 하곤 한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내가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거야?' 올해만 해도 계약기간 최소 3년, 계약 규모 천억 짜리 입찰 프로젝트를 나와 팀 동료 몇 명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진행했다. 우리는 입찰을 진행해 본 경험도 거의 없고,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게 없었지만 오로지 그걸 담당하는 부서였기 때문에 해야 했다. 


회의실에서 다 같이 모여 프로젝트 관련 논의를 하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최상의 방법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고려할 것들이 많아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결론과 원점으로의 회귀를 몇 번이나 겪고 난 후였을까. 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리 회사에서 크게 관심 없는 분야긴 하지만 회사 비용이 천억 나가는 사업인데, 우리끼리 이렇게 뚝딱뚝딱 진행해도 되는 거예요?"


다들 '내 말이' 하는 표정으로 "그러니까요.",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동의의 말을 짧게 뱉었다. 그중 한 동료가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쑥 내밀며 한 말에 우리 모두가 빵 터졌다.


"천억 먹을 사람 여기 여기 모여라~" 


(천억 짜리 입찰 프로젝트는 '회사 내부의 절차'에 맞춰 '문제없이' 마무리됐다.)





회사가 '주먹구구식으로' 또는 '허술하게' 일을 한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사람이 일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고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도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오랜 기간 한 분야에서 일을 해서 노하우가 쌓일 수 있지만 그 노하우가 유효한 건 어디까지나 그 노하우로 해결 가능한 일들만 발생했을 때이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이슈와 문제들도 나날이 새롭다. 결국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르는 상황'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회사에서 일이란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일은 다른 조직,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중에는 자신이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는 독불장군, 일은 안 하고 생색만 내고 싶어 하는 프리라이더, 회사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루팡, 내년이면 집에 갈 사람 어르신 등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건 그들의 입장을 모두 '고려해서'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배가 산을 넘어 우주도 넘어 안드로메다로 가버리게 된다. 때문에 많은 경우 주먹구구식으로, 좀 세련되게 말하자면 융통성 있게 적당히 일처리 하지 않으면 일이 아예 매듭이 안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진행되는 이유는 일은 사람이 하지만 회사에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회사일수록 회사에 필수 기능을 조직화하여 각 조직이 자신의 일만 잘 수행하면 최고의 성과를 내진 않더라도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기능이 서로 다른 부서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실패 요인을 감지하고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일을 진행할 때 모든 관련 부서의 의견을 취합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된다는 단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존 사업을 망치지 않아야지만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수도 있는 법이다.


회사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더 공고한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필연적으로 부족하고 언제든지 실수할 수 있는 '인간1)'을 보완하고 아우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많은 회사들이 더 나은 시스템, 더 나은 프로세스를 개발하고 정착하기 위해 큰돈을 투자한다.


1) 시도 때도 없이 "난 넌 믿지만 사람은 안 믿어." 외치던 상사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 실수하지 않도록 여러 차례 확인하라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돌아보니 결국 날 안 믿는다는 말이었다. 난 사람이 아니라서 믿었냐!! 속이 후련했냐!!


시스템이 공고할수록 한 사람이 맡아야 하는 일의 범위가 줄어들고 깊이가 얕아져서 일하기가 점점 수월해진다. 결국 사람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다2). 어느 날 갑자기 퇴사자가 생겨도 그 공백이 금방 메워진다. 아니, 그냥 메워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원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새로운 균형을 찾아간다. 그것도 하루 이틀 만에 말이다. 어쩌다가 휴가자가 몰려 사무실이 횡~해져도, 극단적인 경우에 집단 퇴사가 발생해도 회사는 돌아간다. 회사를 망하게 만들 정도의 사고가 아니라면 회사 자체적으로 사고를 수습하고 원상 복구를 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이 생긴다. '가장 훌륭한 리더는 일 잘하는 리더도, 직원들의 존경을 받는 리더도 아니라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조직이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리더3)'라는 말은 결국 시스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시스템을 만들든, 훌륭한 인재를 뽑아서 훈련을 시키든 리더한테 의존하지 않고 조직이 스스로 성과를 내게 하니까 말이다.


2) 입사하고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실무는 똑똑한 고등학생이 와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거 낸가 잘나서가 아니라 회사가 50년 넘게 만들어놓은 시스템 덕분이었다. 좋은 시스템은 사람을 대체 가능하게 된다. 좀 삭막하게 말하자면 회사의 시스템이 좋아질수록 사람은 부품화 된다.  

3)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조직에서 진짜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 그 순간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간다. 오너(owner)만이 자리를 비울 수 있다. 그나저나 많은 대기업들이 조직의 최상위 리더들의 '부득이한 공백'에 아랑곳하지 않고 역대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 내곤 한다. 그 최상위 리더, 즉 대기업 총수들은 훌륭한 리더라고 해야 하나. 




다시 후배의 말로 돌아가서.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일할 줄만 알았어요. 막상 들어와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이렇게 허술할지 몰랐어요. 근데 신기한 건 그렇게 해도 일이 어떻게든 진행이 돼요."


그 자리에서 후배의 말에 내가 했던 대답은 이거였다.


"그나마 똑똑한 사람들이 와서 한다는 수준이 이 정도 아닐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일의 기쁨과 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