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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Dec 31. 2021

I say "행복하다", You say "그렇다'

헤이 요 커몬

지금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진 문화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배 제의'라는 게 있다.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건배 제의를 하면서 소위 '건배사'를 하는 건데 뭐 저딴 걸 하나 싶다가도 (아주 가끔) 센스 있는 건배사로 술자리가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효과가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었다.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회사에 만연한 문화였기에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센스 있는 건배사 모음'이름의 자료가 돌아다녔고, 심지어 기사가 나기도 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건배사 중에 여전히 기억하고 아마 평생 기억 할 두 가지 건배사가 있다.


하나는 '화향 백 리, 주향 천 리, 인향 만 리' 다. 이 건배사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이뤄진다.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고 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귀하신 분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인 만큼 앞으로 저희의 인연이 천 리, 만 리보다 더 멀리 닿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화향'을 외치면 여러분들께서는 '백 리', '주향'을 외치면 '천 리', 마지막으로 '인향'을 외치면 '만 리'를 외치시면 됩니다. 화향!! (백 리!!) 주향!! (천리!!) 인향!! (만 리!!) 건배~~~ (건배~~)" 


짠짠짠 하고 다 같이 원샷.


내가 26살 신입일 때 회사에서 인자하기로 유명한 임원이 했던 건배사였다. 그때는 이 문구가 참 멋있다고 생각했고 아재 같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비단 문구가 멋있기만 한 게 아니라 그날 술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도 좋았고 분위기도 좋아서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의 사람들은 각자 서로의 길로 뿔뿔이 헤어졌지만 그 추억만큼은 '만 리'보다 더 멀리 이어져오고 있다. 


나머지 기억나는 건배사는 '행복하자! 그러자!'다. 이건 뭐 별다른 멘트가 없다. 그저 건배 제의를 하는 사람이 '행복하자자!'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러자!' 외치며 짠짠짠 하고 다 같이 원샷 하면 끝이다. 


이 건배사는 내 생애 첫 팀장님의 인생 모토였다. 팀장님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에게 행복하자며 '행복하자, 그러자'를 외치게 했다. 당시 함께 했던 팀원들 사이에선 '행복하자, 그러자'가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만나면 반갑다고 '행복하자,그러자' 헤어지며 또 만나요 '행복하자, 그러자'를 외쳐댔다.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시든, 심지어 집에서 혼술을 할 때도 술잔을 들고 '행복하자 그러자'를 외쳤고, 평상시에도 나도 모르게 무슨 주문을 외듯이 흥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으로부터 3주 정도 지났을까. 아무런 이유도 없고 예고도 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행복하자, 그러자'가 아니라 '행복하다, 그렇다'라고 해야겠다.'


특별히 좋은 일이 있어나 신상에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평상시와 똑같이 사무실에 앉아서 남들이 알아주진 않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실제로 회사가 돈을 버는 거랑은 상관없지만 남들이 중요시하는 일들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며칠 전 응급차에 실려갔던 우리 둘째 딸의 건강을 걱정하며 아침에 유치원에 등원하기 싫어하는 첫째와 첫째와 전쟁을 벌이는 아내를 생각하다가 '이 정도면 행복하게 살아왔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10년 전 팀 멤버들의 술자리*'가 있을 때 이런 식으로 건배 제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같이 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멤버들이 일 년에 한번 꼴로 술자리를 가진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이런 인연도 회사에서 갖기 힘든 인연이라는 감사함 같은 게 있다.


"10년 전 팀장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자, 그러자'라고 하셨습니다. 팀장님은 모르셨겠지만 그 문구가 우리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유행어가 돼서 지난 10년 동안 수백 번도 넘게 '행복하자, 그러자'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문득 우리 정도면 행복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불행해서 '행복하자, 그러자'를 외친 게 아니고 인생이 항상 행복할 수 만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행복하다!'를 외치면 '그렇다!'라고 외쳐주시면 됩니다. 행복하다!! (그렇다!!)"


짠짠짠 하고 다 같이 원샷.


으으. 맨 정신엔 생각만 해도 오글거리네. 하지만 다들 좋아하겠지. 소주 최소 한 병 반은 먹고 해야겠다.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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