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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Feb 10. 2022

회사에서는 일 못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신입 때였다. 팀에 덜렁거리는 선배 A가 있었다. 연차도 낮지 않았는데 실수가 잦았다. 항상 마음이 딴 데 가있어 보였고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수습하거나, 그의 일인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진짜 저 사람 왜 저래. 너무 한 거 아냐?"


팀의 또 다른 선배 B가 나에게 A 욕을 했다. 평소에도 욕을 하긴 했지만 그날은 유독 심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가 말했다.   


"그래도 악의는 없잖아요."


실제로 A는 (아마도) 악의는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고의로 일을 안 하거나 남을 괴롭히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B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마치가 내가 A라도 되는 것처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쏘아붙였다. 


"회사에서는 남에게 피해 주는 게 악이야. 사람이 좋아도 일 못 하면 나쁜 거라고."


충격이었다. 악의가 없어도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니. 착한 사람도 남한테 피해를 줄 수 있다니. 이렇게나 '결과주의적'일 수 있다니.


하지만 그 후로도 꽤 오랜 기간 나는 사람이 좋으면, 사람이 착하면 조금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그래서 나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보듬어주려고 했다. 받아주고 싶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사실 이제는 안 하는 거랑 못 하는 거랑 별반 차이가 없다. 안 하는 게 못 하는 거고 못 하는 게 안 하는 거다). 그럴 여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다만, 받아주지도 못하고 지켜주지도 못하지만 욕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일 못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미움 정도가 아니었다. 그건 증오였다. 그들 때문에 내가 고생해야 하는 데서 분노를 느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그렇게 일도 못 하면서 월급을 받아간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꼈을 때, 그런 사람들은 단순히 일을 못 해서 내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는 수준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들을 또 증오했다.


이제는 연차도 어느 정도 찬 데다가 회사에 큰 욕심이 없으니 주위에 그런 사람이 출몰하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서 멀어진다. 나를 괴롭힐 건더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그 부담은 나 아닌 동료들에게 돌아가는데 어쩔 수 없다. 내가 동료들을 위해 그 부담을 짊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동료나 후배의 고통을 알고서도 외면하는 내 모습에서 예전에 한창 내가 힘들어할 때 같은 팀 선배들도 내가 힘들어한다는 걸 알면서 외면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됐으니 미워할 수가 없다. 다를 거라고 믿었지만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린 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럴수록 점점 뭐가 맞고 틀린 건지에 대한 기준이 사라진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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