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 이마 라인에 특이점을 발견 한 건 10년 전(만 26살), 자취방에서 출근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아주 미묘하게, 다른 사람은 절대 모르지만 나만 알 수 있는 변화를 감지했다. 순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기분 나쁜 싸함 같은 게 흐르며 회사 탈모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들은 머리 빠진 남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탈모라니.. 내가 탈모라니!! 일 분 전까지만 해도 지각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회사와 출근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출근도 하지 않고 바로 병원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숙련된 직장인답게 일단 사무실로 향했다. 팀 사람들에게 얼굴도장 찍고, 자리에 컴퓨터를 켜고 바로 사무실에서 뛰쳐나와 그 길로 탈모 선배가 평소 자신의 탈모 무용담(?)을 들려주면서 추천했던 탈모 전문 병원에 달려갔다. 울부짖으며... 그게 소주 한 잔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못 이룬 첫사랑과의 이별보다 진한 눈물을 흘리게 한, 내 모발 수호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머리카락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처절했다. 탈모 약이라는 비교적 간단하고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 있었지만 그 부작용에 대해 신경 쓰기 귀찮아서 약은 복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약은 먹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하므로 나중에 먹더라도 약 없이 싸워왔다. (근래 들어서 그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한 것 같아 슬슬 탈모약의 세계에 발을 디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약 없이 잘 버텼다. 졌잘버.)
회사 화장실에서 사람들한테 들킬까 봐 몰래 탈모약을 바르고, 엄마가 볶아준 검은콩을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선두처럼 콩주머니에 넣어서 들고 다니면서 약처럼 먹기도 했다. 카페인이 안 좋다 해서 커피를 끊고 하루에 녹차를 열 잔씩 먹었고 의식적으로 수면시간도 늘렸다. 왕성한 성생활은 탈모에 해롭다 해서 금욕적 생활(??)을 하기도 했다. 단언컨대 탈모에 좋다는 영양제(비오틴, 엘시스테인, 맥주 효모 등)를 지난 10년 동안 하루에 한 번도 먹지 않은 날이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집에는 각양각색의 탈모 샴푸가 쌓여갔다. 아마 시중에 나온 탈모 샴푸 중 70~80프로 이상은 최소 한번 써봤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집에 쌀은 떨어질지언정 탈모 샴푸와 탈모 영양제는 떨어지지 않았다.
탈모 사실을 숨기면서 혼자 끙끙 앓는 게 귀찮아서 회사에서 첫 탈밍아웃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이를 불문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탈모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탈모약을 복용 중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요즘 애들은 탈모가 없더라도 예방 차원에서 복용을 하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내 탈밍아웃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숱 많은데? 탈모 맞아?"라고 물었다. "머리가 있는 곳엔 숱이 많아. 근데 머리 있는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지난 10년간 고난과 마음 조림의 기억들, 탈모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하자면 밤새도록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들이 생생한데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든다.
'머리는 왜 이렇게 일찍 자라는 거야. 머리 자르러 가기 귀찮은데...'
물론 머리가 자라는 것과 머리가 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머리가 몇 없더라도 머리 자르는 게 귀찮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건방지다. 그동안 얼마나 머리에 집착하고 마음 졸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머리가 있으매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하다니. 굳이 좋게 해석하면 나이가 들어 탈모에 많이 의연해진 내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지만 역시 건방지다. 모(毛)성모독이다.
2012년, 난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할 대상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었다. 실컷 탈모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웬 결혼 이야기냐. 결혼 결심은 오로지 탈모에서 비롯됐다. 지금이야 시간이 많이 흘렀고 결과적으로 생각보다'는' 머리가 안 빠졌다는 걸 알지만 당시에는 하루아침에 모든 머리카락이 없어질 것 같은 공포감에 쌓여있었다. 그전에 결혼을 해야겠다 싶었다. 고등학생들은 성적이 배우자 얼굴을 바꾼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20대 후반 나는 머리카락이 배우자의 얼굴을 바꾸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탈모 때문에 결혼을 빨리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머리카락 때문에 결혼을 빨리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는 사람들이 부럽다. 탈모가 아닐 테니까.)
요즘은 그래도 나아졌지만(나아졌기보다는 서로 지쳐서 피할지도) 작년까지만 해도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 지겨울 법도 했는데 우린 지치지 않고 싸웠다. 부부 싸움은 매번 새로웠다. 아내도 나도 일에 지치고 육아에 지쳐 모두 힘들어서 그랬다. 우리 안의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없어 서로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았다.
한 번은 왜 결혼을 했을까 후회할 정도로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싸우고 난 후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어디서부터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하는 감상에 빠져 있다가 습관적으로 앞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때 거울에 비친 이마라인을 보며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래... 머리 빠져서 결혼했지... 솔직히 더 빠지기 전에 잘했어...'
지난 명절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와이프가 우리 부부 싸움 썰을 풀었다.
"부부 싸움하고 남편이 집 나간다고 짐을 쌌었거든요. 며칠 뒤에 화해하고 나서 남편 회사 가고 제가 가방 정리하는데 깜짝 놀랐잖아요."
참고로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 내가 집 나가겠다고 세 번 정도 짐을 쌌다. 둘 중에 하나는 집에서 나가야지만 그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날 것만 같았는데 아내는 절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내가 짐을 쌌다. 절대 내가 잘못해서도 아니고 쫓겨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나간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갈 데가 마땅치 않아서 나가지 못했다. 막상 나가려니까 숙박비도 아까웠고 그 짐을 들고 출근을 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러다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나가야 되지?라는 생각이 들고나서부터는 짐 싸기를 그만뒀다.
"남편 출근하고 나서 짐 정리하려고 가방을 딱 열었는데, 맨 위에 탈모 영양제가 수두룩 담겨있는 거예요. 집 나가니, 이혼하니 하면서 짐을 싸는 그 심각한 상황에서 탈모 영양제들을 그렇게 다 챙기다니. 얘가 탈모에 진심이구나 생각했죠. 이게 짠하기도 한데 너무 웃긴 거예요."
듣다가 나도 웃었다. 장인, 장모님도 웃고, 엄마 아빠도 웃었다. 슬프지만 그 상황이 웃겼을 거라는 건 인정한다. 부들부들.
"이혼하면 새사람 만나야 되는데 더 지켜야지. 사십 대 중반부터 머리 있고 배 안 나오면 재혼 시장에서 일등급이라고 하더라. 악착같이 지킨다. 두고 봐라."
결혼하면 머리 좀 빠져도 될 거라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또 그게 아니더라. 정도는 좀 덜하긴 하지만 똑같이 걱정되고 똑같이 신경 쓰인다. 결혼하고 싶어서 지켰는데, 이혼하고 싶어도 지켜야 하다니. 어쩔 수 없다. 없으면 이제 닥치고 살아야 한다. 다만 한 올 한 올 소중한 머리카락 이지만 그래도 역시 머리 자르러 가는 건 귀찮다. 데헷.
(근데 사실 나이 드니까 머리 자르는 것뿐만 아니라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고 심지어 밥 먹는 것도 귀찮을 때도 있다. 이거 나만 그런 건가? 그래도 노는 게 귀찮아지진 않겠지. 노는 게 귀찮으면 죽어야 된다 그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