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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Feb 20. 2022

회사 다닐 이유를 찾습니다

월급 말고

최근 후배들에게 걱정 어린 질문을 두 번 받았다. 올해 초 저녁식사를 하고 야근하러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번 주는 애들 자는 거 한 번도 못 보네."


월요일, 화요일 출장에 수요일, 목요일 야근으로 아이들이 깨어있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다. 


"내일(금요일)은 꼭 일찍 가야지."


나는 혼잣말인지 남한테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 되는 말들을 계속 내뱉었다. 


"그렇네요. 애들이 아빠 많이 보고 싶어 하겠어요."


옆에서 걷던 후배가 맞장구를 쳐줬다. 후배의 눈을 잠시 보다가 답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애들이 날 보고 싶어 하겠어. 내가 애들이 보고 싶지."


그날 야근도 어쩌다 보니 열한 시가 넘어서 끝났다. 내 자리에서 다 같이 모여 마무리를 하다가 잠깐 아내에게 전화가 와서 통화를 했다.


"형수님이 요즘 뭐라 안 그러세요?"


통화를 끊고 나니 후배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응? 뭘요?"

"출장도 많이 다니고, 야근도 많이 하고 그러니까 혼자 애 보시면서 안 힘들어하세요? 형수님 일도 하시잖아요."


그날 집에 들어가서 자기 전에 아내에게 후배 이야기를 꺼냈다.


"후배들이 내가 요즘에 집에 잘 안 들어오니까 자기 안 힘들어하냐고 물어보던데."

"그러니까 말이야. 자기 혹시 바람피우는 거 아니지? 옷 사고 집에 안 들어오면 바람피우는 거라 그랬는데."


마침 내가 작년 겨울에 옷과 신발을 엄청 샀다. 아내의 말에 웃으면서 답했다.


"진짜 솔직히 네가 그런 생각할 거 같더라. 크크크."

"그게 아니라면 그냥 어색해. 자기가 그렇게 일 열심히 하는 거."

"뭐 열심히 하는 건 아니고 자리를 지키는 느낌이긴 한데. 근데 내 컴퓨터도 여섯 시 넘어가니까 막 버벅거리더라. 내 컴퓨터도 어색한가 봐."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회사에 많은 일이 있었다. 조직개편이 크게 이뤄져서 임원과 팀장이 싹 다 바뀌었다. 우리가 관리하는 가장 큰 거래처도 작년 말을 기점으로 계약이 종료되고 새로운 거래처에 업무 인수인계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우리 팀이 생긴 지 3년 만에 내부 감사를 받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문제 투성이었다. 새로운 팀장은 기존 팀장이 만들어놓은 체계를 자신 입맛대로 바꾸려고 했다. 기존 거래처가 제대로 협조를 안 해줘서 새로운 거래처로의 업무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3년 동안 누군가의 부탁으로, 누군가의 지시로 했던 일들이 모두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감사 대응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과장님, 요즘 괜찮으세요?"


부산 출장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하던 중이었다.


"요즘 좀 어려운 회의가 많았잖아요. 하고 싶지 않은 소리도 많이 하셨고. 저희끼리 있을 때 과장님 걱정 많이 해요. 힘드실 거 같다고."


속으로 날 걱정해주는 후배들에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진심이든 말 뿐이든 어쨌든 말이라도 고마웠다. 아닌 게 아니라 스트레스가 있긴 했다. 


기존 거래처와 계약을 종료하면서 그동안 해결되지 않은 이슈들을 해결해야만 했고 그 선봉에 내가 있었다. 거래처를 상대로 어떨 때는 달래고 어떨 때는 싸웠고 어떨 때는 철면피를 깔고 막무가내로 쪼았다. 기존 거래처와 신규 거래처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도 내가 가운데서 해결을 해줘야 했다. 문제 해결이 어렵다기보다 돌변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내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게 힘들었다.


감사 대응도 마음 컨트롤이 많이 필요했다. 나는 작년 동안 육아휴직을 가 있었고 돌아와 보니 많은 것들이 이상하게 돌아가 있었다. 복직 후 팀장에게 그런 잘못된 구조를 바꾸자고 이런저런 제안을 많이 했는데 모두 거절당했다. 그 잘못된 구조로 발생한 문제로 시작된 감사였고 그 대응을 내가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짜증 났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근데 그런 것보다 더 큰 고민이 있었어요.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후배는 전혀 예상 못한 전개에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사실 4년 전에 이 회사를 떠난 사람이거든요. 마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휴직 두 번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붙어있어요. 결말을 알고 있는 소설을 읽고 있는 거라고 해야 하나. 


대리님 말대로 그런 일들 하기 너무 싫었죠. 나 진짜 남한테 싫은 소리 하기 싫어하거든요. 해야 돼서 하는 건데 그래도 힘들긴 하죠. 그런 건 그냥 돌아서서 시간이 지나면 털어낼 수 있어요. 


근데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런 걸 하고 있어야 하는지, 내가 떠나기로 한 회사에서 뭘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강해져요. 아무런 보람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오로지 월급 때문에 다닌다? 월급 너무 중요하긴 한데 오히려 그 때문에 나 스스로가 보잘것 없어지는 느낌이랄까. 그 돈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많이들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게 당연한 건 아닌 거니까요. 아무튼 난 이번 출장 올 때부터 지금까지 그 생각뿐이었어요.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월급 말고 회사를 다닐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온전히 정신적으로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이유. 마침 올해 초 조직개편과 업무 분장을 새로이 하는 과정에서 몇 명의 후배를 거느린(?) 파트장이 되어 있었다.


"대리님이 말한 그 힘든 일들. 그거 내가 안 하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럼 누가 하겠어요. 대리님들이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열심히 대응하는 거예요. 


작년에 내가 육아휴직 복직하면서 했던 말 기억해요? 우리는 각자의 역할에 맞춰서 각자의 일을 해야 한다고. 작년에 대리님들 엄청 바빠도 내가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안 도와줬잖아요. 대신 내가 아무것도 안 한건 아니었어요. 더 큰 관점에서 구조적으로 그 바쁜 것들을 해결할 방법을 궁리하고 그렇게 구조를 만드려고 노력했단 말이에요. 다 실패했고 그 과정은 대리님들도 다 봤으니 알 거예요. 


지금 우리 힘든 거 사실 까놓고 말하면 내가 직접 하거나 결정한 일은 하나도 없잖아요. 다 작년에 대리님들이랑 팀장님이 만들어놓은 결과잖아요. 그렇다고 지금 와서 내가 '너네들이 한 짓이니까 난 상관없어. 내가 그렇게 말했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하고 빠지면 내가 월급을 대리님들보다 월급을 왜 더 받아요. 내 월급 대리님들이 가져가야지. 무엇보다 그렇게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는데 책임도 지라고 하면 대리님들이 심적으로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거 내가 당해봐서 알아요."


어느덧 술이 좀 돼서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후배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정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대충 마무리해야지. 


"아무튼 난 선배는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고 후배는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더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어릴 때부터 내 가치관이었어요. 옛날부터 형들이 어려워하고 오히려 동생들이 더 편해하는 사람이었어요."


"왜요? 왜 과장님은 그렇게 윗사람한테는 엄격하고 아랫사람한테는 관대해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라 잠시 대답을 못했지만 바로 우리 친누나가 생각났다. 우리 친누나가 정확히 그런 사람이었다. 강강약약. 강한 사람한테는 강하고 약한 사람한테는 약한.


"글쎄요... 내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요? 내가 그런 걸 받았으니까 남한테도 줄 수 있는 거죠. 나는 그냥 나이가 많다거나, 연차나 직급이 높아서 주어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거 같아요. 내 기준에서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권위를 부여하는 거 같아요."


결국 나는 후배들을 이끈다는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렇게 정했다. 그거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물론 이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뭐가 맞는 건지,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게 된다. 내 마음이 갈대와 같이 흔들리고, 손바닥 뒤집는 거보다 쉽게 변한다는 건 확실하다.


"좀 오글거릴 수도 있지만 내가 한 가지 부탁만 할게요. 이건 내가 신입일 때 나보다 십 년 선배한테 들었던 말이기도 해요. 나중에 후배가 들어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지금 나한테 받았다는 만큼 그 후배한테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후배한테 똑같은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후배의 십 년 후배가 내 딸이 되지 않으란 법이 없잖아요. 나는 아런 생각이 세상을 조금씩 좋아진다고 믿어요. 진심이에요."


이야기가 많이 샜다. 어쨌든. 


그만둘 때는 그만두더라도 지금처럼 다녀서는 안 되겠다. 지난 몇 년 간 최선을 다해 동료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월급 루팡을 되려고 노력했지만, 이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끊임없이 편하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조그마한 일이 생겨도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렇게 스트레스받느니 차라리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육아휴직 복직 전에 우리 가족 단톡방에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단순 월급 루팡이 아니라 완전히 미친놈이 되야겠어. 아무도 날 못 건드리게 말이야."  
"넌 미친놈이 되기엔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어. 그냥 열심히 월급 루팡이 되렴." 


우리 누나의 답변이었다. 뭐 사랑을 많이 받은 거랑 상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월급 루팡이 될 깜냥도 못된다는 게 판정이 났다. 회사 사람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을 배포도 없고 하루 9시간, 출퇴근 시간까지 합치면 11시간을 보람 없이 보낼 여유도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 의미 없이 회사를 다닐수록 마치 내 주체성이 갉아먹히는 것 같다. 첫 번째 육아휴직 후 됐어도 가지 않았을 회사에 자소서를 넣는 시기가 있었다.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기로 했는데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고, 일단 되면 갈지 말지 고민하자는 생각이었는데 100% 서류 심사에서 떨어졌다. 내가 가고 싶지 않다고 나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가고 싶지 않은 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합격을 하니 자존감이 떨어졌다. 지금 내가 회사를 다니는 느낌이 그때와 비슷하다(똑같진 않다. 적어도 지금은 월급은 받으니까). 월급만 받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분명 다짐했지만 오히려 그 월급만 보고 다닌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떨어진다.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만 아는 것일지라도 회사에서 성취감이 필요하다. 커리어나, 평가, 진급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회사에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나의 연차에 맞는 리더가 된다거나 하는 그런 보람을 느끼고 싶다. 그게 바로 내가 회사를 다닐 이유가 될 것 같다. 그걸 찾는 것이 요즘 내 인생의 몇 가지 큰 고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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