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님은 언제 퇴사하실 거예요?"
순간 당황했다. 출장에서 복귀하는 차 안이었다. 후배가 갑자기 나에게 퇴사를 언제 할 거냐고 물어봤다. 퇴사할 거냐고도 아니고 언제 퇴사할 거냐. 당황한 나와는 달리 후배는 너무나 평온했다.
"난 대리님 앞에서 한 번도 퇴사라는 단어를 쓴 적도 없는데요? 제가 퇴사할 거 같아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요?"
"그냥요. 과장님은 뭔가 회사에 미련이 없어 보여요."
첫 번째 육아휴직이 끝날 무렵 회사 인사팀으로부터 "복직할 건가요?"라고 연락이 왔었다. 그때는 내가 퇴사하려다 말고 육아휴직 썼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기에 복직할 거냐 퇴사할 거냐라는 질문이 나름 합리적(?)이었다. 그런 상황을 감안해도 복직할 거냐는 질문이 꽤나 낯설었는데,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10년 후배의 질문은 사뭇 새로웠다.
"글쎄요. 로또 되면?"
후배에게는 대충 말하고 넘어갔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나는 퇴사 시점을 상상해왔다. 희망퇴직, 로또 등등. 상상 속 상황은 다 달랐지만 빠지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역시 돈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얼마냐'이다. 난 둘째가 태어나면서부터 내 퇴사의 조건을 현금 2억으로 생각해 왔다. 빚 없이 현금 2억을 만드는 시점에 나는 퇴사를 할 생각이었다.
현금 2억이면 요즘같이 자산 가치가 높아진 세상에 절대 크다고 할 수 없는 돈이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자녀 둘을 둔 30대 후반의 가장에게는 더더욱 크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다. 하지만 높아진 자산 가치가 착시 효과를 만들어서 그렇지 2억은 절대 작은 돈도 아니다. 내 현재 월급과 향후 몇 년 동안의 인상률을 감안하더라도 2억은 내가 대략 5년은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다. 그건 온전히 통장에 꽂히는 금액 기준이고 내가 사용할 돈을 제외하고 모은다고 하면 10년을 모아도 현금 2억은 모으기 쉽지 않다. 2억이라는 돈은 그만큼 큰돈이다.
2억을 갖고 하고 싶은 게 있는 게 아니다. 그 돈은 아내에게 모두 줄 것이다. 아내가 그 돈을 어떻게 쓰든 일절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에게 시간을 달라고 할 것이다. 아내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시간의 대가로 지불할 셈이다.
퇴사하면 일단 다 잊어버리고 쉴 거다. 살면서 막연하게 세월을 헛되이 보내본 적이 없다. 항상 시간에 쫓겼다. 적어도 퇴사하고 얼마 동안은 내가 시간 위에 있어 보고 싶다. 가끔 가족의 눈치가 보일 때면 나이 오십에나 쥐여줬을 돈을 10년 일찍 줬다고 정신 승리하며 허송세월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인생의 계획과 목표를 세울 것이다. 남들이 하니까 했던 공부, 남들이 가니까 간 대학교, 남들이 하니까 한 취직. 그런 거 말고 정말 내가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죽기 전에 뭘 이루고 싶은가 고민할 것이다.
결국 내가 당장 퇴사할 수 없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계획이 없어서다. 계획이 있다면 굳이 '2억을 아내에게 주고 퇴사해야지' 같은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아내가 나한테 퇴사하고 뭐 할 건데 물었을 때 아무것도 없이 '일단 쉴 거야' 말하는 거와 2억을 손에 쥐여주면서 '일단 쉴 거야'하는 건 천지 차이다. 2억 정도는 손에 쥐여줘야 아내도 '이놈이 안 해서 그렇지 한다면 뭐라도 할 놈이야'라고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 아내의 생각은 다를 수 있음.
그런데 요즘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내가 2억을 너무 물로 봤던 것 같다. 왜 이렇게 돈 나가는데 가 많은지. 재테크는 왜 그렇게 내 마음대로 안되는지. 나를 위해 쓰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통장에 돈이 쌓이지가 않는다. 푼돈 아껴 재테크해봤자 푼돈이거나, 그마저도 잃게 된다. 회사를 다니면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어떻게든 2억을 모으는 게 더 쉬울 줄 알았는데 2억 모으는 게 훨씬 더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어떻게든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 관심을 쏟고 있다.
퇴사 그놈, 참,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