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의 쓸모

by 고야씨

해가 바뀔 무렵 사소한 즐거움이 하나 있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넓은 종이가 생긴다는 것.

12월이 되면 신년달력이 선물로 들어왔다.

시장에 갔던 이웃이, 여기 달력이 좋더라고, 하면서 우리집에 달력을 두어 개 나눠주기도 했고,

우리 엄마가 이웃에게 줄 달력까지 한가득 받아 오기도 했고,

우체부 아저씨가 면사무소나 종묘사, 의원, 교회 달력을 놓고 가기도 했다.

달력을 나줘주는 곳이 여러 군데인 만큼 달력은 집집마다 넉넉하게 돌아갔다. 돌돌 말린 채 장롱 위나 선반 사이에 쌓인 달력도 다 쓸모가 있었다.

달력은 넘치지 않는 것.


해가 바뀌면, 지난 달력에 적힌 메모 중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 새 달력으로 넘어온다. 그러고 나면 임무를 마친 작년 달력은 나와 동생 차지가 되는데, 달력의 모든 뒷장, 하얗고 넓은 그 면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새해 무렵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눈이 왔을 때 첫 발자국을 남기듯 열두 장 소복소복 빠짐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행복감.



그렇다고 모든 달력에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다.

만두를 빚어, 밀가루를 살짝 뿌린 쟁반에 가지런히 담고, 깨끗한 달력을 뜯어 만두를 덮어두기도 했고,

채반에 하얀 달력을 깔고 튀김이나 전을 올려, 담백하게 기름 빼기도 했다.

빳빳한 달력 뒷면에는 동그라미 말판을 그려서 윳놀이를 했고, 갑자기 선물을 해야 할 때 예쁜 달력을 포장지처럼 쓰기도 했다. 아낌없이 주는 달력 같아.


나와 동생은 새 달력에 우리 생일과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를 표시했다. 생일은 특별히 별과 하트를 더 많이 그렸다. 일주일 차이로 우리 생일이 있는 9월은 다른 달보다 아기자기했고, 생일만큼 마음을 쓴 크리스마스 덕분에 12월 달력도 알록달록 했다.


달력으로 또 무얼 했던가. 학을 접고 배를 접고 모자를 접고 동서남북을 접고 종이비행기도 접었다. 또 아빠가내 교과서를 말끔하게 달력으로 싸주기도 했다. 엄마가 참빗으로 내 머리를 빗겨 머릿니를 잡아줄 때도, 아빠가 도루코 접이칼로 내 연필을 균형있게 깍아줄 때도 달력을 폈다.


난 종묘사 달력이 좋았다. 종묘사 달력엔 윤기 나는 과채 사진이 선명하고 큼직하게 있었다. 달을 넘겨가며 그 자태를 감상할 때 어쩐지 홀리는 기분이었다. 어느 달 사진이 제일 좋은지 친구들과 골라보기도 했다.


올해 다이소 신년달력 중 레트로 벽걸이 달력이 인기였다고 한다. 투박하고 커다란 옛날 달력에 향수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나보다. 마음을 은근하고 오래 건드리는 건 어딘가 기억이 묻어있는 것들이다. 새롭게 휙휙 바뀌는 요즘 유행에도 은은한 향수가 남으려나, 다 기억을 할 수나있으려나, 그걸 모두 기억한다고 하면, 그 기억에다 자리를 내어준 각자의 옆, 따뜻한 물성을 가진 은근한 어떤 것들이 까맣게 까맣게 빛을 잃어가고 있는 건지도 몰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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