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삶은 농담이다

by 햇살아래

가끔 그런 상상을 해 보곤 한다. 인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 또는 소설처럼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면 하고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가게 된다면 이미 출발점부터 달라질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만큼 커다란 무기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 진도준이 승승장구하게 되는 이유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거나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물론, 재벌집 일가가 아닌 이상,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전 따위가 일어날 일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삶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생에 있어 어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때면 늘 많은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결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선택일 수도, 나쁜 선택일 수도 있다. 만일 결과를 알 수 있다면 선택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테고, 걱정과 근심도 없을 테니 말이다.


시간 여행을 다룬 드라마 중 <내일 그대와>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유소준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 시간여행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지하철을 통해 짧지만 미래로 다녀오는 일이 가능한데, 덕분에 손대는 사업마다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다 자신이 가까운 미래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는 자신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현재가 아닌 미래에만 집착하게 되고 곧 불행해지고 만다. 그러니 만일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해도 지나치게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오히려 재앙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라는 소설에는 인간과 같이 의인화 된 죽음이 등장한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느날, 죽음은 온 나라의 모든 이들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중지시키지만, 갑자기 변심해 다시 죽음을 집행하며 죽음이 예정된 이들에게 예고장을 보낸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을 준비하고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예고장을 받은 사람들은 오히려 더 큰 혼란과 슬픔, 원망과 분노에 잠기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내일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선 커다란 축복인 셈이다. 미래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다 혹여나 자신의 죽음이나 끔찍한 사고 따위를 미리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 충격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드래곤과 엘프가 등장하는 톨킨식 판타지 배경을 차용한 소설 또는 게임에서는 ‘필멸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필멸’은 반드시 멸망하는자 또는 반드시 죽는자를 뜻한다. 드래곤은 영생을 살기에 긴 잠에 빠져들거나 무료함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되곤하고 엘프 역시 인간과 달리 영생을 살지만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문화와 문명의 발전보다는 기존 것을 지키는 원시적인 모습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미래를 향해 달려나갈 수 있는 이유는 반드시 죽기 때문이며, 찰나와도 같은 시간을 살기 때문이다. 유한한 삶이야 말로 인간이 적극적으로 살아나가며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힘이라는 것이다.

만일 영생을 살수 있다면, 내일의 의미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내일과 오늘은 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인간은 늘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도 더 나은 삶을 위함이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유한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무한한 삶을 살게 된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적극성은 희석되거나 옅어질 것이 자명하다. 무언가를 이뤄야 하는 절박함을 느낄 이유도 없을테니 말이다.


유한한 삶 속에서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내일을 알게 된디면 아마 인간이 지닌 필멸자 혹은 유한성에 기인하는 힘은 사라지지 않을까.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고 지나간 시간은 과거가 되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시간의 방향성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과거로 돌아가는 일 역시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는 이론에 불과하며 그 같은 사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시간 여행자를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호킹이 한 실험은 간단했다. 만일 시간여행을 하는 이가 있다면 호킹이 이야기 한 시간에 호킹이 이야기한 장소로 정확히 찾아오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호킹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간 여행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고 실험 시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공개했다.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시간과 장소였지만, 시간 여행자라면 호킹의 실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므로 호킹이 말한 시간과 장소에 찾아오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장소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시간에 방향성이 없다지만, 시간은 늘 일직선으로만 흐르는데 이는 ‘엔트로피’의 증가 때문이라고 한다. 뜨거운 물을 상온에 방치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식고 만다. 다시 열을 가하지 않는 이상 식어버린 물이 뜨거워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시간도 이와 같다. 한번 어지럽혀진 방이 깨끗하게 정리되기 위해서는 수고를 들여 청소하고 정리를 해야만 하고, 정리를 하는 행위는 물리적인 힘을 가하는 형태다. 이처럼 어떤 외부의 에너지가 개입하지 않는 한 쌓인 엔트로피를 되돌릴 수 없기에 시간여행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런데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불가능하지만, 재미있게도 미래로의 시간여행은 지금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중력이 큰 행성이나 블랙홀 근처를 지나는 일이다. 이때 ‘시간지연’ 현상이 나타나고, 만일 1년 뒤 지구로 돌아온다면 지구의 시간은 1년이 아니라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이 지나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시간여행이 아니라 시간의 상대성으로 인한 결과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개념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미래의 지식이지 시간을 뛰어넘는 현상이 아니다. 그러니 아쉽게도 미래를 아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의 절대적 지배를 받지만, 사실 우주에는 시간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은 원시 우주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발사되었는데, 제임스웹이 포착하는 수십억 광년 떨어진 별의 모습은 지금이 아닌 과거의 모습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별의 과거일 뿐,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의 광활한 시간에 비한다면 인간의 시간은 찰나의 찰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절대적 시간의 지배를 받고, 시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인생은 짧다지만, 짧은 인생안에도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속에서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지고, 선택에 따른 희노애락도 시시각각 변한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때면, 만일 선택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리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고민도 걱정과 근심도 없을테고 이처럼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될지 모르니 말이다. 미래의 지식을 바탕으로 편한 선택만 하면 될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은 오히려 권태로움이 가득할지 모르겠다. 마치 컴퓨터 화면에서 자판을 튕기듯 너무나 쉬운 삶을 살아간다면 그만큼 재미없는 일이 또 있을까.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고 선택에는 늘 후회가 뒤따르지만, 어쩌면 그것이 삶의 참 맛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시행착오속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삶의 여정 말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분명히 다른 삶을 사는 일이 가능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인생에서의 치열함은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신현림 시인은 <나의 싸움>이란 시에서 이렇게 썼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에서는 진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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