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사라진 세상이 온다면

by 햇살아래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죽음의 중지>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같다. 그러나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죽음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막연히 바란 적은 있어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일은 없다. 우리 사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독특한 상상력으로 죽음이 중지된 세상을 그려나간다.


어느날 죽음의 변덕에 의해 온 나라의 누구도 죽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공식적으로 누구도 죽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나 죽음만 중지되었을뿐, 늙거나 병드는 것은 똑같다. 불치병에 걸렸거나 치명적은 부상을 당한 이도 죽지 않는다. 고통은 그대로인데 말이다.

죽음이 중지된 세상은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커다란 혼란이 다가오며 오히려 죽기를 바라는 이들도 등장한다. 특히 임종을 눈 앞에 둔 노인들은 안식을 위해 국경을 넘으려 애쓴다.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기에 ‘필멸자’라 불린다. 필멸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반드시 멸망할 자’를 뜻하고, 간단히 말하면 ‘언젠가 죽는자’다. 필멸자는 주로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 자주 언급되지만, 필멸은 매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불멸을 살아가는 드래곤 또는 엘프와 달리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힘과 가능성은 바로 이 필멸에서 나온다고 하니 말이다.


반드시 죽기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떠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바로 필멸에 있다는 것이다.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 라자>에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이 대사야말로 인간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인간은 선대로부터 문화와 역사, 지식을 전수받고 후대에 계승한다. 인간은 선대가 남긴 유산을 발판 삶아 성장해 나가고 다른 종족과 비견되는 문화적 발전과 정신적 발전을 이룩한다. 그러니 나는 단수이지만, 또한 단수가 아닌 셈이다. 우리 세계가 이룩한 역사와 문화, 과학의 발전도 모두 ‘유한성’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요즘 세상을 두고 100세 시대라고 말한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간의 기대수명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만일, 기술 발전으로 인간이 영생을 얻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어떨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 같은 이야기는 과학계에서는 꾸준히 논의되고 있는 일이다. 바로 GNR(유전공학, 나노공학, 로봇공학/인공지능)혁명에 의해서다.


기술의 발전속도가 가속화되면서 ‘기술적 특이점’이 자주 언급되곤 한다. 기술적 특이점은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초지능이 탄생하는 시기를 뜻한다. 특이점이 발생한다면 이후의 기술 발전 속도는 더욱 가속화 된다. ‘수확가속의 법칙’에 의하면 기술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그래프 형상을 보인다.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고, 이 연쇄과정을 거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공지능이 만든 기술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노화의 극복, 인간 유전자 정복, 뇌 정보 복제, 나노봇을 통한 질병 치료, 컴퓨터와 인간의 결합 등 상상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 가능해지리란 전망이다.


이 이론을 구체화시킨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불로불사에 집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같은 혁명이 일어난다면 영생이 결코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장기는 인공 복제된 장기나 기계로 대체될 수 있으며, 뇌 마저 복제가 가능해지면 기계 몸에 의식을 옮기는 일도 가능해진다.


에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는 ‘전뇌화’란 개념이 등장하는데, 전뇌화는 뇌를 복제해 전자화 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복제된 뇌는 기계 몸체에 다운로드 되고 사이보그화 된다. 기술 발전은 이같은 개념도 얼마든지 가능케 할 것이다. ‘호모데우스’ 인간이 신의 지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묘사되는 ‘불멸’은 불행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떠나가고 자신만이 남게되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신은 늙지않고 죽지 않지만, 자신과 관계 맺은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씁쓸하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일이 모두에게 일어난다면 상황은 제법 달라질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는 축복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결코 축복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판타지 소설속에서 불멸의 존재이거나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종족들은 대게 변화를 두려워하며 긴 시간 권태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인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생을 누린다면 무언가를 위해 적극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시간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금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현실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첫 번째로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므로 인구가 늘어나기만 한다면 이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쯤되면 우주로의 진출은 필연이 될테지만, 인간의 몸으로 우주 정복은 수많은 난관에 봉착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인간은 지구환경에 걸맞게 진화해왔기에 우주 환경은 인간이 살아가기엔 너무나 척박한 곳이다. 제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고해도 이를 개척하기 위해선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예측 할 수 없다. 이 사이 지구 환경은 초토화 될지도 모른다.


인간이 호모데우스의 경지에 이른다고해도 자연을 지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주 문명의 발전 척도를 나타내는 ‘카르다쇼프 척도’에 따르면, 인간의 문명은 아직 1단계 문명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1단계 문명은 지구의 모든 자원, 이를테면 기후마저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카르다쇼프 척도가 과학적 상상에 기반을 둔 것이라곤 해도 인간이 1단계 문명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사이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는 식량 문제와 환경파괴 문제를 야기할 것이기에 지구 온난화는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금성’의 강력한 온실효과와 같이 지구는 불타는 행성이 되어 멸망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영생은 또다른 빈부격차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즉, GNR혁명의 혜택을 볼 수 있는 것은 자본가에 국한되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말해 돈으로 생명을 사는 일이 보편화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가르는 것은 결국 자본의 차이가 될 가능성이 높고, 인간의 생명마저 빈부격차로 나뉘어 진다면 그보다 끔찍한 세상이 어디에 있을까.


지구의 드넓은 대지는 모두의 것이지만, 우리는 이 땅에 울타리를 치고 ‘내 땅’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울타리를 친 대지는 빈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란 말이 있지 않던가. 인간이 신의 지위에 오르는 세상에서는 토지 외에 생명이 또다른 빈부를 가르는 척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술 발전의 혜택을 소수가 독점한다면 이는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다.


세 번째로 제 아무리 영생이 주어진다고 해도 인간 세계의 정치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 역시 거대 자본을 지닌 나라에 국한 될 뿐, 가난한 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로인한 정치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영생을 누린다해도 전쟁의 위협이 언제나 도사린다면, 영생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분쟁으로 목숨을 잃을 이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한편,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속에서는 죽음이 중지되자 종교가 가장 먼저 몰락한다. 인간의 유한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이유는 사후세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사후세계가 필요없다면 종교는 곧바로 신성함을 잃고 만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신이 있는 곳에 도달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쌓아온 정신적 가치의 붕괴를 의미한다. 인간이 쌓아온 수많은 정신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자신이 인간인지 로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뇌 일부를 제외하면 자신의 신체 모두가 기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이 지닌 기억은 온전히 자신의 기억인지를 고뇌한다. 극 중에서는 기억을 조작당하는 이도 등장하는데, 기억의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다른 기억을 심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의 영혼은 단지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에니메이션은 인간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인간이라 부를수 있는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다.


그렇다면 뇌 일부를 제외하고 기계화된 인간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인공장기로 생명을 연장해나가는 인간은 어떨까. 인공장기를 만드는 공장이 일반화되고 돈으로 생명을 사는 일이 보편화된다면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그토록 생명에 집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100세 시대라 불리며 인간이 수명이 과거에 비해 큰 폭으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힘들다. 누구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 따라서 죽음이 중지되는 세상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게 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죽음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해 본 다면 그 또한 축복과는 거리가 멀다.


만일 영생이 가능해진다면 그 다음은 노화의 정복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누구나 노년의 모습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현재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꿈꾼다. 그렇다면 나이듦의 자연스러움도 사라질테고, 인생이란 개념 역시 희미해질 것이다. 현재의 나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삶의 의미도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유한성을 지녔기에 미래지향적이다. 미래를 꿈꾸며 살아나가는 것도 수명이 정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이 사라진다면 나태와 게으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자연스러운 노화가 사라진다면 삶이란 오직 유희를 위해서만 존재할지 모를 일이다. 인간이 쌓아온 문명은 유한성을 바탕으로 이룩해왔기에 유한성이 무너진다면 그 다음 진보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살아있기에 무언가를 꿈꿀수 있고,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밑바탕에는 유한성이 존재한다. 기술발전은 인간에게 영생이란 꿈을 심어주었지만, 다가올 세상이 유토피아가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죽음이 고귀한 이유는 여러 가능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유한함속에서 맺어나가는 관계맺음에 있다. 죽음만큼 달갑지 않은 존재는 없지만, 죽음이란 존재를 통해 우리는 살아나갈 수 있다. 죽음은 축복인가, 불행인가. 기술 발전의 시대 속에서 죽음의 의미를 새겨 볼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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