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후예로서의 상상
우주는 한 점에서 시작되었다. 그 점이 폭발하며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별들이 태어났다. 태양과 지구도 이 한점에서 탄생했으며, 이곳에서 모든 생명이 시작되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이러한 이유로 우리를 ‘별의 후예’라 불렀다. 우리 역시 우주에서 태어난 별의 후손이란 것이다. 한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이 정설로 여겨졌지만, 이제 이를 믿는 사람은 없다.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태양계 너머에는 수많은 은하들이 존재한다.
우주는 광대하고 신비로운 곳이다. 그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시간관념 아래 살아가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절대적인 것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옛 부터 인간에게 시간은 절대적 존재였지만, 시간을 대하는 관념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산업사회 이전의 인간은 자연의 리듬에 맞춰 필요한 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휴식을 취하는 느슨한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농부들은 해가 뜨면 일어나 밭을 갈고 해가지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며 자연스럽게 자연의 순환에 맞춰 살아갔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도래하고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면서 인간의 시간관념은 크게 변했다. 더 이상 자연의 리듬이 아니라 기계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게 되면서 시간관념은 매우 엄격해졌다. 공장의 기계는 밤낮없이 돌아가고, 노동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일해야 했다. 이렇게 바쁨이 미덕이 된 것이다.
산업사회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매일 필요 이상의 물건을 만들어 내는 탓에 버려지는 물건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특히 ‘유행’이 지난 물건은 낡고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금세 버려지게 되었다.
소비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이를 쫓기 위해 더 많은 물건을 소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원 낭비와 환경 오염도 심화되었다. 현재의 기후 위기도 소비 사회가 만들어 낸 자화상이다. 이러한 소비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고, 사람들 사이의 결속도 약화시켰다. ‘나만 아니면 돼’ 라는 말처럼 개인주의가 강해졌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사라졌다.
이는 산업 사회와 함께 엄격한 시간관념이 가져온 변화다. 산업 사회 아래 우리는 더 많은 생산과 효율을 통해 시간을 절약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이러한 가치관은 경쟁을 부추기고 개인주의를 심화시켰다. 반면, 자아의 성장과 성찰은 등한시하게 되었고, 인간의 꿈과 희망은 모두 물질적 가치 아래 갇히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상품이 빠른 속도로 세상에 나올수록 에너지 소비와 환경 파괴도 커졌다. 이는 물리학의 엔트로피 증가 법칙과 맥을 같이 한다. 자연 현상은 언제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엔트로피가 무한히 증가하면 세상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나는 가끔 산업 사회 이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일하는 느슨한 시간관념 속에선 타인과 경쟁하며 바쁘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저 주어진 하루에 만족하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이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반면, 현대 사회로 눈을 돌리면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회사라는 공간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떠오른다. 끊임없이 성공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경쟁에서 도태되면 실패한 삶으로 낙인찍기까지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곧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하지만 공장의 불은 여전히 늦은 시각까지도 꺼지지 않는다. 생산량이 정점에 이른 현대에도 세상은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해야만 한다. 기술발전으로 생산량이 정점에 이르고 노동절약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더 많은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바쁘지 않다는 것은 왠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쉽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우리를 더욱 바쁘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으로 몰아넣는다. “요즘 세상에 저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어디 있어?”와 같은 말은 우리를 더욱 시간에 쫓기게 만드니 말이다.
현대인은 수많은 시간 절약 기술을 갖고 있다. 세탁기, 전자레인지, 청소기 등은 가사 노동을 줄여주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시간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경쟁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일과 학업에 투자해야 하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자극속에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의 등장은 언제 어디서든 일과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들어 오히려 더 많은 개인 시간을 침해하고 있다.
만약 외계인이 우리 세상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그들은 인간이 왜 끊임없이 경쟁하고, 소유하고 파괴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진정한 행복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 문학작품 속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가 디스토피아 세계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외계인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인류를 디스토피아 세계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주를 동경한다.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면 절로 경외심이 든다. 이 우주속에서 먼지 한톨만도 못한 우리가 오로지 경쟁에만 힘을 쏟고 성공이란 가치에만 매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그토록 염원하는 행복에 다가가는 길이 아닐까?
혹자는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처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적당한 돈도 필요하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돈은 있으되 주변에 어울릴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면, 돈은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또한 건강을 잃는다면 돈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웃을 느끼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을 느낄 때 내 삶의 가치와 즐거움도 커진다. 사람은 결국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문유석 판사는 <개인주의자 선언>을 통해 합리적 개인주의자를 제시한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하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지만,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하면서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연대하고 노력하는 것 말이다.
나는 문유석 판사가 말한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많아진다면 좋겠다. 또한 여유롭고 느슨한 시간관념이 확산된다면, 보다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는다. 행복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연관 되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찰나를 살아간다.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 비한다면 인류의 모든 역사를 합쳐도 인류의 세월은 고작 몇 초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후대로 의지와 지식, 문화와 가치관은 전승한다. 그것을 계승한 후대는 전대가 남긴 유산을 습득하고 세상을 발전시킨다. 비록 나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의지는 후대로 영원히 이어진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그 길에 이르는 길은 개인의 힘만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연대를 통해 서로 협력할 때 더 나은 세상이 열리고, 우리의 행복도 커질 수 있다.
우주 속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지만, 이 점안에는 나와 내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곳이다. 끊임없는 경쟁과 소유가 만든 감옥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슨한 시간관념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선다면 찰나의 삶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을까. 완전한 행복이란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