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우 <쇳밥일지>를 읽고
자본주의가 지닌 가장 큰 병폐가 무엇일까? 아마 ‘서열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서열화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순서대로 늘어서게 됨, 또는 그렇게 만듦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서열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바로 ‘자본’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곧 ‘권력’이 되고, 선택의 자유와 영향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서열화는 양극화를 낳고 과도한 경쟁주의를 부추긴다. 이 서열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실패한 인생’이란 낙인을 피할 수 없다.
불행의 지름길은 남과의 비교에서 온다고 하지만, 하루 동안에도 새로운 상품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소비여력은 또 다른 권력이 된다. 미디어는 소비심리를 부추기고, 부의 크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과도한 경쟁심리가 형성되고 SNS는 더욱 남과의 비교와 경쟁심리를 부추긴다.
사는 데 정답은 없다지만, 마치 정해진 정답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를 거머쥐기 위해, 남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 변질된다. 인간이 끊임없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니 직업에는 ‘귀천(귀하고 천함)’이 없다는 말도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말에 불과하다.
그런데 제도마저 이러한 서열화를 부추긴다. 남보라, 박주희 외 1인이 쓴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보면,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 속에서 착취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진다. 제도가 이를 묵인하는 사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는 사라지고, 노동의 신성함이 사라질 때 서열에 대한 집착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천현우의 『쇳밥일지』를 읽었다. 이 책은 노동자 천현우 씨의 회고록이다. 불우했던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착취가 만연한 현장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한다. 또한 가난이 어떻게 우리 삶을 옥죄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책 속에서 본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옥죄어 오는 운명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것도 모자라, 가난이 일상이 되었고, 빚을 갚는 데 청춘을 바치는 삶이 이어진다. 이후 공장 일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우연히 ‘용접’을 접하게 되었고, 용접은 그의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주말 특근을 밥 먹듯이 하고, 주야 근무를 꽉꽉 채워도 그에게 주어지는 돈은 200만 원 남짓이 전부다. 그는 비정규직이었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과거처럼 ‘열심히 살면 볕 들 날이 온다’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일했다. 그럼에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했고, 착취가 만연한 노동 현장과 이를 묵인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탓이다.
언젠가 TED 강연에서 한국인 김아란 씨의 연설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미국 ‘홈리스(노숙자 보호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신발 한 짝이 없어 맨발로 다니는가 하면, 비누 한 장이 없어 세수도 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운동화 한 켤레가 없는 삶, 비누 한 장 없는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을 바라본다면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일 테지만, 김아란 씨는 아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왜 홈리스가 되지 않았지?’
부모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태어나 보니 가난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들을 향해 낙인찍고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직업의 서열에서 밀려나면 “공부 못해서 그런 일밖에 못 하지 않냐”며 멸시하는 것도 흔한 풍경이다. 그러니 성공은 곧 나의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운’의 요소가 크다. 우리가 굶지 않고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다. 만일 내가 내전이 한창인 나라, 또는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났다면 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나눌 수 있다면 혹은 차별의 시선 대신 따뜻함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 세상은 지금보다 더 살기 좋아질 것이다.
또한 모든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청소 노동자가 없다면 거리는 지저분하고 더러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용접공이 없다면 자동차, 선박, 철도 따위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니 모든 직업은 동등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서열에 따른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가 만들어지고, 노동이 신성해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인구 절벽 현상으로 국가 미래에 관한 여러 경고가 나오고 있다. 그냥 놀았다고 대답하는 고학력 백수가 넘쳐나는가 하면, 청년 실업자도 2025년 6월 기준 26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 원인을 흔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천현우 씨의 사례처럼 열심히 일해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기대할 수 없다면,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사회는 이들을 향해서 ‘배가 불렀다’라며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근본적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데 아무리 일하라고 소리쳐 봐야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중간착취의 지옥도』가 다양한 착취의 과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면, 『쇳밥일지』는 착취가 만연한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겪는 대우와 그가 처할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고발서가 아닌가 싶다. 2023년 6월 발의 예정이었던 ‘중간착취 방지법’은 여전히 입법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 사이 벌어지는 중간착취 문제도 만연하다. 또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이 통과되었지만, 노동자의 사망 소식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노동환경의 개선과 중간착취 근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노동자는 단지 가성비 좋은 ‘소모품’에 그칠 따름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이야말로 자본 효율의 극대화, 사람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라지만,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것이 지옥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현실은 단지 몇몇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과 노동의 구조적 관계를 들여다보면, 문제의 본질은 더욱 명확해진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일한 만큼 정당한 보수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약속이 쉽게 깨지는 사회 속에서 노동의 가치가 신성시될 리 만무하다. 게다가 남과의 비교 우위가 당연시된 사회 속에서 차별과 멸시가 만연하고, 노동자는 단지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인간을 소모품 취급하는 사회, 비정하기 그지없다.
노동은 생계·생존을 위해 육체적·정신적 활동을 수행하는 행위로, 경제학적으로는 재화 창출을 위한 인적 자원의 투입을 의미한다. 하지만 ‘노동자’라고 하면 그 어감을 좋게 바라보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노동은 단순 육체노동뿐 아니라 사무직, 서비스업, 정치·기업 활동까지 포함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노동자’다. 노동의 사각지대에서 외면받는 또 다른 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
나 또한 20년 가까이 기계 설계자로 살아왔다. 매일 자정이 넘는 시각까지 일한 적도 많고, 새벽에 퇴근하거나 밤을 새운 적도 많다. 그렇지만 포괄임금제에 묶이기 일쑤였고, 개발의 공은 내가 아닌 회사가 가져가는 일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니 노동환경 개선과 법과 제도 개선은 단지 비정규직의 일만이 아니다.
모든 노동의 가치는 동일하다. 『쇳밥일지』는 단순히 한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 회고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외면해 온 구조적 폭력과 침묵의 카르텔을 고발하는 증언서이다. ‘쇳밥’이란 단어를 보고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는 자신도 결국 하나의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식어버린 쇳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쇳덩이는 쇳덩이다.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나는 그런 차가운 쇳덩이가 되기보다, 비록 작더라도 누군가의 삶에 의미를 더하는 가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쇳밥은 상징적 의미지만, 임금 노동자라면 쇳밥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이들도 많지만, 직장 내에서는 차별이 만연하고 부당한 지시를 참고 견뎌야 하는 것도 직장인의 삶이다. 마치 하나의 소모품처럼 가정보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노동을 하는 이유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지만, 어느덧 주객이 전도되어 회사를 위해 살아가는 삶도 적지 않다. 노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커질 때 우리 앞에 현실도 개선될 여지가 있다. 세상은 목소리 내는 이들에 의해 바뀐다. 침묵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담담히 자신의 인생사를 이야기하는 천현우 씨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값지고 인상 깊다. 인생의 패자는 없다. 각자의 삶에서 묵묵히 살아나갈 뿐이다. 우리 모두는 노동자다.
나 하나의 외침이 작게 느껴질지라도, 우리가 함께 목소리를 낸다면 이 쇳덩이 같은 세상도 언젠가는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서열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등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