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우리가 익히 아는 전래동화나 동화는 대개 ‘권선징악’의 결말로 끝난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그에 걸맞은 벌을 받고, 이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하나의 규범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법은 곧 정의라고 믿기 쉽다. 그러나 ‘법=정의’라는 공식은 현실에서 종종 허무하게 무너진다.
버스기사가 1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법의 심판을 받는 반면,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은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가는 장면을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해왔다. 그럴 때마다 법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화두 역시 ‘법’이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민주주의를 말할 때마다 법치주의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며, 권력자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원칙이다. 그러나 현실의 법치주의는 ‘법 기술’ 앞에서 쉽게 무력화된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해서 도덕적 문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말은 언제나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되어 도덕적 비판을 억누른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인과 재벌, 권력자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법과 도덕 사이의 괴리를 실감하며 법치주의에 대한 회의에 빠진다. ‘법 기술’은 분명히 존재하고, 권력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법의 허점을 파고들며 빠져나간다. 그러다 보면 애초에 “법은 약자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애초에 법은 약자가 아닌 강자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 말이다.
18세기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만큼 순진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 문명사회의 진정한 창시자다.”
사유재산이 생겨나자 강자와 약자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강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규칙, 즉 법을 제안했다. “우리 함께 규칙을 만들고 모두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자.” 이것이 법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법치주의는 언제나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말과 함께 도덕적 지탄은 자취를 감춘다. 반면 권력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법의 심판보다 도덕적 재판이 먼저 시작된다. 이른바 ‘인민재판’이다. 이후 법적으로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도덕적 비난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권력자에게 법적 무죄는 곧 도덕적 무결성으로 작동하고, 일반인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일부는 그 원인을 정치적 무관심에서 찾는다. 일반인 중에서도 연예인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존재이기에 정치인이나 권력자보다 파급력이 크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지’이고, 한 번 손상된 이미지는 되돌리기 어렵다. 그래서 법보다 앞선 도덕 감정이 먼저 적용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에 의해 운영되고, 법 역시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공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도덕적 무결성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에 무관심한 유권자라면 정말로 공정한 법치주의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도선우 작가의 소설 『저스티스맨』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고, 그는 마치 자신의 싸인인 양 피해자의 이마에 총상을 남긴다. 이 연쇄살인은 엄청난 화제가 되고 인터넷 공간에서는 저스티스맨이란 닉네임을 쓰는 이가 나타나 사건에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재구성한다. 곧, 피해자들은 모두 그럴듯한 죄를 저질렀고, 저스티스맨은 이들을 단죄하는 영웅으로 칭송된다. 하지만 마침내 피해자가 거물 정치인이 되자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피해를 당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여론으로 형성된 영웅은 어느덧 추악한 범죄자가 된다. 이처럼 여론은 종잇장처럼 가볍지만 동시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만 가혹한 경향을 띤다. 소설과 같이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일도 이와 같다.
정치인이나 권력자에게는 언제나 강한 면죄부가 주어지고, 내 이익을 실현시켜 주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논리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으면 이른바 ‘해 처먹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긴다. 이미 사람들의 인식 속에 무너진 법치주의와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리 만무하다.
법은 여론을 따라 움직이고, 판사 또한 자신이 지닌 정치적 신념에 따라 흔들린다. 명백한 죄를 단죄하는 것이 이처럼 어렵다면 우리는 허울뿐인 법치주의속에 살고 있을 따름이다.
진정한 법치란 무엇인가. 권력자 역시 법의 온당한 심판을 받고, 법이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용어만 남발되고, 법치에 대한 인식마저 무너진 사회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일은 어쩌면 지나치게 순진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법을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결국 권력자들도 여론에 따르고,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권력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명분’인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 명분엔 언제나 국민이 등장한다. 국민을 위한다는 고리타분하고 지켜지지 않을 약속 말이다. 정작 감시받아야 할 권력은 법 뒤에 숨고, 대중의 비난 화살은 애꿎은 개인의 도덕성만을 과녁으로 삼는다
나는 법치주의가 허울뿐인 말에 지나길 원치 않는다. 법이 무엇인지, 법이 진정으로 약자를 보호하며 강자라도 법 앞에 정말로 평등한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진정으로 법치주의가 실현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싶다. 법이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라도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결국 법이 정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관심으로 비롯되는 변명이 아니다. 그것을 감시하는 시민의 눈일지도 모른다.
법=정의가 성립 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법의 판단을 내리는 것도 인간이며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이 너무 쉽게 감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