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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보내준 사골국물

by 고요한동산

"가스가 폭발했어."

아이를 재우려고 누워있는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스 폭발이라니..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고향집에는 마당에 가스레인지가 하나 더 있다.

엄마는 여기서 하루 종일 뼈를 우려 기름을 깨끗하게 건져내고 뽀얀 사골을 끓인다. 가스레인지 옆에는 가스통 하나가 연결되어 있다.

가스가 폭발했다는 말에 나는 이 큰 가스통을 떠올렸다. 한순간에 휩싸인 화염 속에 비명을 지르는 엄마의 모습이 환각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밤 9시 아이들을 재우려던 찰나였다.

허둥지둥 일어나 옷을 꺼내려는데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안 된다고 지금 와도 엄마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아이들이 다가왔지만 눈물이 고여 모습이 흐릿해졌고, 그 위로 불에 휩싸인 엄마의 잔상이 겹쳐 보였다. 심장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설명을 잘못해서 너 더 놀랐겠다. 가스폭발까지는 아니야. 부탄가스가 가스레인지불에 닿아서 터지면서 엄마 팔이랑 다리에 불이 붙었어."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막아두었던 둑이 무너지듯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엄마가.. 불 속에서 못 나온 줄 알고.."

끄억끄억 울음이 걸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화상병원에 입원을 했다.

팔다리에 불이 붙고 엄마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빠가 불을 껐다. 화상을 입었을 때는 흐르는 찬 물에 화상부위를 식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엄마는 30분이 넘도록 찬물에 몸을 담갔다.

"응급처치를 잘하셨네요. 경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수술까지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의사 선생님이 엄마를 칭찬했다.


언니가 소식을 듣고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을 때는 엄마가 입원한 지 일주일이 훌쩍 지난 뒤였다.

"애들 걱정하니까 절대 연락하지 마."

엄마의 당부에 아빠도 우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 엄마가 어떤 고통에 있는지 모른 채 일상을 보냈다.

엄마는 자신의 아픔보다 자식이 느낄 아픔을 걱정했다.


자식들 모르게 병원에서 홀로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동안 무엇이 바쁘다고 먼저 전화 한 통을 하지 않았다. '요즘 엄마가 전화를 안 하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히 하루를 넘기곤 했다.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것에 후회를 하며 내가 얼마나 나쁜 딸인지 이야기했더니 언니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몇 번 통화를 했어. 그런데도 몰랐어. 엄마 목소리에 힘이 없네라고만 생각했어."

미리 알아채지 못함이 죄스러워 우리는 스스로를 힐책했다.


이제는 KTX를 타고 1시간 40분이면 서울역에서 동대구역에까지 갈 수 있다. 시간상으로는 충분히 가까운 거리인데 외국이라도 나가 있는 것처럼 자주 들르질 않았다.

사고 후 대구에서 만난 엄마의 다리는 근육이 다 빠져 말랑말랑했다. 팔과 다리에 하얀 굵은 띠를 두른 듯 하얗게 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피부를 다 잘라내고서야 드레싱을 하는데, 화상이 그렇게 고통스러운지 몰랐어."

뒤늦게 엄마는 그때의 아픔을 회상하면서 다 지나간 일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팔과 다리에는 화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고장 난 무릎을 살살 달래며 산지 십 년이 넘었고, 당뇨는 좋아하던 음식을 줄이게 했다.

약해져 가는 엄마를 보며 서른여덟의 엄마를 떠올려보았다.

엄마의 나이 서른여덟은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그녀를 바라보게 한 숫자였다.


서른여덟 번째 생일에 그녀는 안방에서 홀로 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엄마의 눈물에 당황한 열 살의 나는 못 본 척 슬그머니 피해 딴짓을 했다. 막내가 다가가 "엄마, 왜 울어? 울지 마." 하며 엄마를 꼭 안아주었다. 나도 그렇게 엄마를 안아주면 좋았을 텐데 후회가 남았다. 막내의 위로에 엄마는 눈물을 쓱 닦고 씩씩하게 일어나 밥을 차렸다.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엄마의 서른여덟의 나이.

엄마의 해지는 몸을 보며 마음에는 불안함이 쌓여간다. 모두가 겪어야만 하지만 겪고 싶지 않은 일이 최대한 늦게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본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엄마는 늘 괜찮다고 한다.

아픈 엄마는 자식들 마음이 아플까 봐 혼자서 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문 앞에 아이스박스가 택배로 와있다. 그 안에는 구수한 사골국물이 먹기 좋게 소분되어 담겨있다. 냄비에 팔팔 끓여 파를 송송 썰어 올리고 밥을 말아먹었다. 사골국물은 맑고 구수했다. 하루 종일 밖에 서서 기름을 살살 건져내며 몇 차례 정성스레 고아냈을 사골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엄마의 사골을 오래도록 맛볼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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