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문 - 사하스라라 차크라(빛의 에너지)
"고요한 동산, 인도 갈래?"
"인도? 거긴 왜?"
"내가 좋아하는 교수님이 다른 교수님들 모시고 인도여행을 간대."
"그래서?"
"나도 인도 가고 싶어."
친구가 사랑을 쫓아 인도를 가자고 했습니다. 마침 도보여행을 가겠다고 일도 그만두었고, 그다음 일정도 없었기에 친구가 짜놓은 일정에 맞춰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인도 어디를 갈 것인지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정말 도보여행 가듯이 배낭 하나 매고 한국땅을 떠났습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같겠지 하면서 말이지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미 낯선 곳에 서 있었습니다.
인도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나를 반긴 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매캐한 공기였습니다. 목에 두른 손수건으로 재빨리 입을 가렸지만 먼지가 계속해서 목을 타고 넘어왔습니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으니 노랑초록의 오토릭샤가 우리 주위를 둘러쌌고, 우리는 어떤 차를 선택할지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지불할 금액이 정당한 금액이 맞는지 알지 못한 채 친구와 나는 오토릭샤를 타고 낯선 땅 가운데로 이동했습니다.
도착한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사진에서 보았던 오묘한 빛을 그려내던 하얀 궁전 타지마할을 보러 갔습니다. 겨우 찾은 타지마할은 먼지로 가득한 하늘 아래서 빛을 잃고 세월의 흔적을 안은 허름한 궁전처럼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타일은 변색되고 곳곳에 금이 나있었습니다. 타지마할은 사진 속 모습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순간 내가 찾아 헤매던 것도 어쩌면 네모난 틀에 담은 잘 찍어놓은 형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곳곳에는 비루하게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는 수행자들이 보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의심스러웠습니다. 성전에 가면 눈썹사이 붉은 점을 찍고 축복을 내려주었습니다. 감탄하며 지나가려고 하니 손을 내밀고 "10루피"를 요구했습니다.
인도는 요가를 배울 때 상상했던 곳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저 숨쉬기 힘들고 냄새나는 곳이었고, 방심하면 지갑이 텅 비어 버리는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기차를 타는 동안 가방에 자물쇠를 채워야 했고 옷 안쪽으로 돈과 여권을 넣은 복대를 숨기고 잘 때도 절대 풀지 않았습니다. 기차 안에서는 몸을 낮춰 노래를 부른 후, 노래값으로 10루피를 받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래주문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들은 자들에게 돈을 요구했어요.
"내 노래가 당신에게 축복이 되었기를. 그러니 10루피."
그렇다고 주지 않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유유히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습니다.
인도에서는 원치 않아도 이렇게 축복을 많이 내려주었습니다. 그들의 축복이 진심이라면 10루피가 너무 저렴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인도의 해변 고아로 가기 위해 열여섯 시간 동안 기차에 머물렀습니다. 기차 베드에 누워 할 일 없이 창문 밖을 내다보다 선로에 빗자루를 들고 홀로 앉아 먼산을 바라보던 한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눈빛이 너무 공허해 보여 한참을 바라보았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보이자 소년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나는 천천히 지나가는 기차 안에서 소년의 흔적을 눈으로 좇아보았지만 귀신처럼 사라진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였을까요.
인도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날 내가 보았던 소년도 어쩌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자신이 돌아가야 할 자리로 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인도에 3주 동안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습니다. 같은 땅 위에 있었지만, 머무는 위치에 따라 음식과 숙소, 그리고 삶의 모습이 달랐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경계가 그곳에는 있었습니다.
하긴, 내 안에도 인식하지 못하는 경계와 구분이 있으니까요.
그곳에서는 계층에 따라 피부색이 달랐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피부는 밝아졌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피부의 명도는 계급을 나타내는 그래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밝음이 삶까지 밝히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신문에는 신부의 지참금이 물건의 가격처럼 적혀 있었고, 사람들은 같은 계급 안에서 결혼하며 그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피부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애쓰는 모습이, 과연 신과 가까워지는 길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모순이었습니다.
모순된 세상. 모순된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모순된 채로 놓여있는 나.
달리던 기차는 이유 없이 멈추더니 몇 시간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시간에서는 몇 시간이 몇 분과 같았고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여유롭게 출발을 기다렸습니다.
천천히 가면서 그들은 웃었고, 오랫동안 멈추어도 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왜 아무도 항의를 하지 않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기다림에 가만히 머무르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인도는 시간에 쫓기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사람과 차가 뒤범벅된 소란스러운 풍경 안에 소가 한적하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걷는 것과 차로 가는 것이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정도로 함께 섞여 서로를 인정하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어요.
나는 인도를 이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걷는 것을 이해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인도는 그냥 그런 곳이었습니다.
인도의 성스러운 물, 갠지스강에 다다랐을 때 한쪽에는 뜨거운 불꽃에 계속해서 영혼의 그릇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나무장작 불꽃에 무심히 뼈들이 타다닥 튀고 있었고, 마침내 불씨가 꺼진 곳에서는 남은 뼛조각이 항아리에 담겨 가족에게 전해졌습니다. 가족들은 배를 타고 작별한 이의 뼈를 강에 뿌려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주었습니다. 그곳에는 사라지는 것은 없었고 변화되는 과정만 있었습니다.
영혼이 담긴 물을 성스럽게 마시고 몸을 씻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 그것은 그저 더럽고 냄새나는 강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식을 바라보고 나서야 깨끗함과 더러움이 그들에게는 중요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순적이라고 틀린 것이 아니고, 옳다고 해서 모순이 없는 게 아니야.'
'모든 것에 앞 뒤 맞는 논리적 설명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어.'
정돈되지 않은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의식. 그들의 믿음, 그들의 방식은 그들에게 그저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무언가를 규정하려고 하는 마음을 걷어내 보니 그 자리에 모든 것이 나에게도 괜찮게 보였습니다.
내가 가진 틀이 따뜻하게 녹아, 어떤 모양으로도 변화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수많은 개념과 상황, 현상들에 금이 가거나 깨어지지 않고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내가 찾고 있던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단해 놓았던 막을 걷어내고 나니,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차크라의 문을 하나씩 열고 마지막에 도착한 그곳에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내가 미소 지으며 서 있었습니다.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가 닿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져야 하는지. 얼마나 초월적인 상황이 나타나야 하는지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계속해서 반복했습니다.
쓰다 보면 내가 벗겨지고 그러다 다시 덧씌우고, 아무것도 없는 내가 부끄러워지고, 포장된 내가 낯 뜨겁고.
이런 모순에 놓이면서 결국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나로 돌아와 끼적이고 있었습니다.
건강한 손가락을 움직여 쓰고 그렇게 쌓인 글자 하나하나가 문장이 되어 돌아와 나를 비추었습니다.
비친 나는 극적인 변화를 겪은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일상의 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숨을 쉬는 그대는 살아 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베트남 출신 불교 스승이자 명상가 틱낫한 (Thich Nhat Hanh, 1926–2022)의 말씀입니다.
그는 특별한 곳으로 가야만 진리에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숨 쉬고 있는 존재 자체가 이미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하스라라 차크라는 어디론가 올라가 도달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열리는 에너지였습니다.
사하스라라 차크라는 머리 꼭대기에 위치한 마지막 차크라입니다. 천 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처럼, 닫혀 있던 의식이 조용히 열리며 나와 세상의 경계가 사라지는 자리입니다.
"모두 괜찮다"는 삶의 평온,
나에서 시작해 다른 존재로의 확장된 시선,
말이 아닌 존재 자체로 공감하는 힘,
찾아올 수밖에 없는 "끝"마저 받아들이는 마음,
이 고요한 에너지가 나와 세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그저 존재하는 나로 충분해집니다.
이제 사하스라라 차크라의 에너지를 깨우고 내면의 고요와 연결되도록 돕는 아사나를 만나보겠습니다.
아무것도 더할 필요도, 덜어낼 필요도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쉬게 됩니다.
의미: Sava는 ‘죽음’, Asana는 ‘자세’를 뜻합니다.
바닥에 등을 대고 편안하게 눕습니다.
두 발은 골반보다 조금 넓게 벌리고, 발끝이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향하도록 둡니다.
양팔은 몸에서 약간 떨어뜨려 두고, 손바닥은 하늘을 향해 열어둡니다.
눈을 감습니다.
몸을 바르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잘 놓여 있습니다.
이제 몸의 무게를 하나씩 바닥에 맡깁니다.
발의 무게가 바닥으로 스며들고, 종아리와 허벅지가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골반이 내려앉고, 등과 어깨가 바닥에 닿아 있습니다.
팔의 무게, 손가락의 무게, 그리고 머리의 무게까지.
숨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껴봅니다.
숨이 들어옵니다. 숨이 나갑니다. 당신은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밀어내지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그저 떠오르고 사라지도록 둡니다.
몸도, 호흡도, 생각도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둡니다.
당신은 지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딘가로 가야 할 필요도, 무언가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존재합니다.
당신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이미 충분합니다.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죽음의 자세라는 이름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존재하는 상태로 머무르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머물러 봅니다.
...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볍게 움직입니다.
준비가 되면, 몸을 한쪽으로 굴려 천천히 일어납니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앉아 지금의 자신을 느껴봅니다.
**10분 정도 사바사나로 머물러보세요.
우리는 늘 어딘가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멀리 가보려 애쓸수록, 결국 돌아오게 되는 곳은 지금 이 자리였습니다. 사하스라라 차크라는 새로운 곳에 닿는 경험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와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입니다.
요가는 나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나를 벗겨내는 일이었습니다.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더 나아지지 않아도, 지금 숨 쉬고 있는 나로 충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삶의 여정의 지도 - 차크라 7개의 문을 모두 열어보았습니다.
삶의 여정의 지도를 펼치고 내가 갈 길을 알고 있다면, 그 길은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차크라의 에너지가 당신의 '삶의 지도'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 물처럼 흘러가고, 불처럼 살아 있습니다. 그러다 공기처럼 가벼워지고, 공간처럼 넓어져, 마침내 빛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 여정 속에서, 당신이 늘 당신 자신으로 충분하기를 바랍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의 여정의 지도 - 차크라 7단계>
첫 번째는 물라다라 차크라(뿌리) - ‘나는 여기 존재한다’는 안정의 자리입니다.
두 번째는 스와디스타나 차크라(성골) - 감정과 창조의 흐름이 피어나는 곳입니다
세 번째는 마니푸라 차크라(태양신경총) - 나의 의지와 힘이 깨어나는 중심입니다.
네 번째는 아나하타 차크라(심장) - 사랑의 에너지입니다.
다섯 번째는 비슈다 차크라(목) — 진실을 말하고 표현하는 통로입니다.
여섯 번째는 아즈나 차크라(제3의 눈) — 내면의 통찰과 지혜의 눈입니다.
일곱 번째는 사하스라라 차크라(정수리) —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빛의 자리입니다.
*** 이미지 - chatgpt, Gemini 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