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나무 불꽃
3色의 고통, 그리고 삶과 죽음과 상실
영혜, 인혜 그리고 인혜의 남편. 이들이 이루고 있는 기괴한 삼각관계에는 《고통정리》가 필요하다. 마치 신호등 없는 사거리 처럼 혼잡하고 무질서하다.
영혜는 나무가 되려는 여자다. 어렸을 적 본 개의 죽음과, 그것의 고깃국을 먹음으로서 '그 꿈'이 시작되었고, 개에게 혹은 자신에게 행해진 폭력과 개의 죽음을 방조하고 자신을 폭력으로부터 구하지 못한 그 죄책감으로 고깃덩어리를 먹지 않기로 결심한다. 최종적으로 나무가 되기를 희망하는데, 음식도 먹지 않고 말도 생각도 하지 않는 나무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영혜의 언니 인혜. 그녀는 사랑없는 결혼에서 기인한 갈증, 그리고 장기간 지속된 불면, 잠시나마 눈을 붙일 때 도둑처럼 자신을 안았던 남편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들 지우는 자신을 죽음 끝에서 돌려 세우는 삶의 원동력이다. 결국은 살게 된 그녀. 하지만 살아서도 끊임없이 고통을 느낀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이, 매일을 버텨왔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 별명이 '오월의 신부'였다는 인혜의 남편. 성직자 '신부'의 동음이의어인 이 별명은 고지식하고 올바르고 입바른 소리 할 줄 모르는 그를 두고 친구들이 붙인 것이다. 도덕적 강박에 가까운 그의 성격은 그를 무기력하고 피로하고 권태롭게 만들었다. 인혜가 항상 지쳐보이는 그를 쉬게 해주고 싶어 결혼을 하게 됐을 정도였다. 게다가 불혹에 가까워지면서 탈모가 시작되고 배가 나오는 등 노화의 증상이 드러나면서 그는 삶에 더욱 큰 회의를 느낀다. 그런 그를 사로잡은 것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남아있는 처제의 몽고반점. 그 푸른 반점에서 그는 자신에게 없는 생기와 젊음을 느낀다. 결국 그는 그 몽고반점에 현혹되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또 다 잃고 말았다. 그는 고통을 해소하고자 상실을 택했다.
소설의 이해를 돕는 곳곳의 장치들
- 날개: 남편이 유독 좋아했던 피사체. 때문에 그의 작품 곳곳에 날개있는 것들의 비행장면이 삽입되었는데, 주로 다리가 무너질 때나 장례식 등 죽음과 관련된 장면에서 사용 되었다. 그 날, 구급대가 도착했을 때도, 베란다로 날아올라 머리를 깨뜨려 죽으려고 했던 것, 그리고 영혜가 큰 병원으로 이송될 때 먹구름을 향해 날아간 검은 솔개 등에서 날개와 죽음을 연관지을 수 있다.
그러나 아들 지우의 꿈에서 나왔던 흰 엄마새는 날개 대신 두 손이 돋아 나왔고, 인혜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살았다. 이는 날개의 상징이 죽음이라는 것을 더욱 명료하게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 나무: 내장이 퇴화되고, 말과 생각이 없어지는 것. 영혜가 생각하는 나무가 되는 것이란 결국 죽음이다. 자신이 나무처럼 죽고 나서야 샅 꽃을 피워낼 수 있음을 믿고 있는 영혜. 죽음은 진정한 나무, 혹은 식물이 될 수 있는 수단이다.
- 나무 불꽃: 나무에 목을 매려 모빌 장식을 떼 버리고 끈만 말아 준비해온 인혜. 그 때 나무들은 짐승처럼 완강히 버텨 인혜의 목숨을 지켜 내려고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 나무 불꽃은 생명을 의미한다. 죽으려고 한 인혜를 살린, 그리고 영혜가 이송될 때 다시 한 번 타올라 영혜의 죽음을 막아보려 하지만, 인혜는 그를 쏘아 볼 뿐이다.
- 두 갈래 길: 환자인가, 보호자인가. 인혜가 정신 병원에 가기 위해 올라탄 버스 안에서 느낀 불편한 시선들. 의심, 경계, 혐오, 호기심으로 버무려진 그들의 시선은 결국 사회가 개인에게 보내는 시선과도 같다. 사회는 개인의 몰개성과 획일화를 장려한다. 조금이라도 튀면 나쁜 시선을 보낸다. 조금 더 쉽게 통치하기 위해 정해진 틀에 맞춰 살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마주하는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우리는 각기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영혜가 아니었다면 인혜가 죽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영혜를 돌보았더라면 인혜는 그로부터 도망쳤을 지도 모르며, 잠적한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반갑게 받았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그 이미지를 직접 실현하려고 결심한 것, 영혜가 나무가 되기로 결심한 것, 인혜가 자살을 결심한 것도 모두 우리가 운명에서 마주한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한 무언가와 같은 것이다.
- 욕조: 인혜가 남편을 이해하게 되는 장소임과 동시에 영혜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삶을 떠올린 고독의 장소다. 남편은 옷을 벗을 힘도 없다는 것 처럼, 옷을 입은 채 욕조에 웅크리고 있던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욕조 안에 똑같이 웅크린 인혜는 검은 숲에서 진흙에 덮이고 있는 영혜의 모습, 그리고 자살하러 갔던 그 숲에서 완강히 살라고 호령하는 나무 불꽃에 대한 이미지를 보았다.
- 검은 솔개: 새인 것, 날고 있는 것, 날개가 있는 것, 이 모든게 남편의 작업속에 자주 등장했던 죽음의 상징이다. 게다가 색까지 검고, 검은 먹구름을 향해 날아 오르는 솔개. 바로 영혜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치이다. 검은 솔개가 날아오르는 것을 본 인혜는 조용히 숨을 몰아 쉬며 자신을 살렸던 나무 불꽃을 쏘아 본다.
- 보라색 티셔츠: 인혜의 삶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아들의 배냇내와 젖내가 아직도 남아 있는 면티셔츠는 빛이 바랠대로 바랬지만 아직도 그녀에게 안정감을 준다. 아마도 남편에게 있어 영혜의 몽고반점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어린 아이의 배냇내와, 어린 아이에게만 있는 몽고반점이 묘하게 닮아 있는 듯 하다.
영혜를 대하는 인혜의 자세: 심리 변화
어릴 적 부터 인혜에게 있어 영혜는 책임을 지우는 존재였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같이 맞고 자란, 네 살 터울진 여동생은 아마도 각별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값싼 추문이 시작된 그 사건 현장에서도 인혜는 남편보다는 영혜를 지키려 했었다. 하지만 남편이 잠적하고, 비싼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읍단위 소재 정신병원으로 영혜를 옮겨야 했던 인혜. 여느 때보다 동생의 존재가 복잡 미묘하게 다가온다.
① 미움: 무감각한 얼굴을 하고 텅빈 눈으로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드는 영혜를 보며, 인혜는 폭력을 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맨 처음, 자신의 삶이 모래언덕처럼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했을 때 인혜는 제일먼저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영혜의 칼을, 남편을 막지 못해 초래된 '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영혜에 대한 은근한 미움은 단단한 성실의 관성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다. 비용을 들여서라도 영혜를 곁에 두기 싫은 인혜. 마치 동박새를 물어 뜯은 영혜처럼, 뜻모를 폭력성이 고개를 쳐든다.
② 갈등의 해소: 소설이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영혜를 아이처럼 묘사하는 장면이 많아진다. 가벼운 몸, 솜털, 가늘고 힘없는 머리카락 등 꼭 인혜의 아들이 아직 젖먹이였을 때의, 강보에 싸여 있는 갓난이 같은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은 인혜의 시선이 지배적이므로, 영혜를 미워했던 인혜가 점점 영혜와 아들 지우를 동화시킴으로써 미움을 버리게 되는 것, 즉 갈등이 해소됨을 느낄 수 있다. 영혜는 미움의 대상에서 다시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그 위치를 옮겨오게 된다.
③ 이해: 남편의 불화로 인한 불면과 폭력적인 도둑잠이 지속되자, 인혜는 어느 새벽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그 즈음 한 달간 하혈이 계속되었고, 가끔 시한부 인생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병원에 가던 날, 자신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의 죽음에 가까워 졌을 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상처도 아물어 간다. 그러나 인혜는 살았다는 기쁨보다는 오히려 살아야 한다는 절망과 고통 속에 산다. 영혜가 각혈하여 큰 병원으로 이송되는 차 안에서, 자신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고통, 즉 자신이 자살을 하러 갈 때의 심정을 떠올리며 이제는 영혜의 나무화를 이해해 주기로 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 검은 솔개가 먹구름 위로 날아 오를 때(영혜의 죽음을 암시), 도로변에 주욱 늘어선 나무 불꽃을 쏘아보는 것이다. 자신을 죽지 못하게 했던 그 나무 불꽃이 다시금 영혜의 죽음앞에 활활 타오르자, 영혜의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십분 이해한 인혜는 그녀의 죽음을 막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무들에게 무언의 항변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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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매는 항상 극과 극에서 대립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끝과 끝을 마주잡고 함께 서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폭력을 뼛속 깊이 담은 쪽과 성실함을 가장한 비겁함으로 살짝 빗겨 나간 쪽, 길을 잃었을 때 그냥 집에가지 말자던 쪽과 집을 찾아가겠다는 쪽, 그리고 남편을 잃게 만든 쪽과 남편을 잃은 쪽, 궁극적으로 죽음과 삶까지 이 자매들은 단 한순간도 같은 쪽에 선 적이 없다. 하지만 항상 같은 판에 서 있었다. 모든 가족이 영혜를 외면했을 때, 인혜만이 영혜를 돌보아 주었다. 온몸으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동생, 그리고 그런 동생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
마치 인혜의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던 그의 남편처럼,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있다. 타인의, 혹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각색의 사랑, 그들의 대립 또한 사랑이었다.
같은 이상향에 이르는 세 갈래의 길, 살거나 죽거나 혹은 전부를 다 잃거나
3인의 삶에 있어 전환의 계기를 준 상징이 있다. 아들, 몽고반점, 나무(식물)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각각 순수하고 결백하며 모든 욕망이 배제된, 어떠한 것에도 찌들거나 폭력 당하지 않은 순백의 것을 나타낸다. 아이의 무구한 천진, 그 아이들만이 갖고 있는 몽고반점, 그리고 말도 생각도 없이 도처에 퍼져있는 나무(영혜에게 나무는 죽음을 상징하므로 무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는 순백이라는 접점에서 만난다. 결국 세 사람 모두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자살을 시도했던 인혜는 죽지 못하고 아이의 곁으로 돌아와 살았고, 영혜는 모든 폭력을 거부하며 점점 나무처럼 말라가는 죽음을 택했다. 인혜의 남편은 평생을 도덕적 강박에 시달리다 엄청난 일탈으로 정상의 범주를 스스로 벗어나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우리 모두 사실은 '잘 살기'를 소망한다. 그 잘 사는 것의 기준은 저마다 달라서 누군가는 고통을 끊어버리려 죽음을 택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돈을 무진장 벌어 들이기를 갈망하고, 또 누군가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고서라도 조금 더 연명하기를 바란다. 소설의 세 인물들이 같은 이상향을 꿈꾸었지만 결국 세 갈래의 운명을 맞이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전 편의 서평을 쓰면서 나는 당신들의 몽고반점이 무어냐고 물은 적 있다. 세상의 기준과 경계를 무너뜨리는 갈망, 모든 것을 잃고서라도 차지하고 싶은 이상향. 그리고 작가는 우리 자신의 몽고반점을 그대로 가려 두라고 말하고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나무 불꽃을 읽고 난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몽고반점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지만 완벽한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라는 연작 소설에는 우리가 삶에서 피하고자 하는 고통, 그리고 추구하고자하는 이상향, 마지막으로 우리를 삶에 붙들어 놓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깃덩어리,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에 이르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한 번 만나게 될 필연적 존재이다.
때를 알리지 않고 불쑥 찾아든 손님은 우리의 인생을 흔들고, 눈이 생기로 번뜩이게 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를 다시 生으로 돌려 놓기도 하면서, 수많은 갈랫길으로 우리를 유인할 것이다. 미끼를 물 것인가? 아니면 몽고반점은 가려두고 심심한(이라 쓰고 안정적인이라 읽는) 삶을 유지할 것인가.
한강이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