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Oct 09. 2017

프레데릭 르누아르, <행복을 철학하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먼저 이 책은 자기계발서나 처세술 처럼 '술술 읽히고 쏙쏙 이해되는'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어렵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한 번 읽고 내팽개칠 만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본인의 행복 가치관을 세우는데 선행학습을 도와주는 인문 서적이다. 공부용이다. 인생공부.


맨 처음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도 어렵고 분량도 많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배운 대로 요약과 발췌로부터 시작하기로 결심!


처음 리뷰의 청사진을 그릴때 아래의 순서대로 써 나갈 예정이었으나,
1. 요약의 이유
2. 요약 정리
3. 감상
 
본의 아니게 요약이 너무 길어진 탓에 선감상 후요약으로 가기로 했다. 요약 부분은 시간적 여유가 되시는 분들에 한해서 천천히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그러나 아직 읽지 않았다면 스킵하는게 좋다. 본인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 보다 짜릿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전에 이 책을 읽었던 분들 중, 다시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경우는 읽기를 추천한다. 책을 다시 읽는 것 보다는 훨씬 효율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요약을 잘했다는 소리가 절대 아님)
 

감상 편


사람마다 우선하는 가치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므로 행복을 한 가지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다. 내가 규정하는 행복이란, 즉흥적인 삶을 모토로 하여 걱정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가장 피폐하게 살아왔다. 물론 이러한 불안과 걱정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성장동력으로 작용하여 실제로 득을 본 경우도 있었지만, 현재는 곧 과거요, 미래이기 때문에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걱정 없이 사는 것이 훨씬 즐겁게 사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반대의 삶은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기쁨은 찰나임에 비하여 고민과 걱정은 너무도 길다... 나는 생각도 고민도 굉장히 많고, 예민한 타입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들들 볶는 경우가 많은데, 몇 년 전부터 현재 내면에서 나를 괴롭히는 불안 요소를 종이에 적어 리스트를 만들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고민과 그럴 수 없는 고민으로 나누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즉시 해결하고 못하는 것은 포기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온 결과, 그나마 걱정에서 조금은 해방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때 하고 있었던 걱정과 고민 중 절반은 무의미했던 것임을 스스로 증명해 냈다. 고민하고 있던 것 중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난 사례는 정말 드물었고, 고민이 된다 할 지라도 절반 이상은 그냥 저절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무의미 한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았음에 대해 깨달았고, 걱정과 고민을 아예 안할수는 없으니 그 시간이라고 줄여보자 하는 목적으로 포기를 대안으로 삼았던 것이다.


보통 자의식이 굳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 힘들 때는 남한테 기댈 줄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니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이다.


암튼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의 인상깊은 점은 동서양의 철학가들의 생각을 비교하여 설명해 주는 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며, 그러한 전개 사이 사이에 저자가 끼어들어 본인의 행복론도 슬며시 끼워 팔기(?)를 시도한다. 특히 몽테뉴와 장자는 자연에 살리라! 를 외치며, 외부환경보다는 내면적인 수양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였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었던 현자들의 생각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물론 행복에 있어 정답은 없다. 이 책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각각의 행복론을 들여다 보고, 나아가 본인의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적 홍보 채널으로써 작용한다.


각각의 행복론을 읽어내려 가면서 본인이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고백하고 앞으로의 삶이 더욱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필요한지 찾아 본인만의 행복론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에너지를 발산하는 삶 - 클럽가기, 콘서트 가기, 등산하기, 운동하기, 운동 경기 관람하기 등등 -에서 행복을 찾는 이도 있을 것이고,


에너지를 축적하는 삶 - 독서, 기도, 수양 등 전형적인 집순이 혹은 집돌이의 삶 - 을 통해 살아갈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다만, 이 책을 읽을 때 만은 후자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로 깊이있고 심도 있게 독서 하시길 바란다!  


요약 편


+ 각각의 숫자는 내가 하루 치 읽은 책의 분량대로 요약을 한 것이라 철저히 임의적임을 밝혀둔다. 읽고 바로 요약을 해서 나중에 타이핑하기 쉽도록 번호를 매긴 것일 뿐 내용상 꼭지가 되는 것이 아님.
 
1.

Q.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가?
- 개인에 따라 현저한 상대성을 띈다. 현재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본다.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감정적인 관계에, 그리고 나르시즘에 물든 사람은 자기 내면적 심리현상에 더욱 초점을 맞춰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정형화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또한 개인의 감성, 생물학적 기질, 환경 등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므로, 행복에 대한 학습이나 성찰을 통해 한층 더 행복해 질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 여행"을 제안하며, 붓다, 쇼펜하우어, 아리스토텔레스, 장자,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몽테뉴, 스피노자의 "행복"을 들여다 보고 "행복한 삶"이라는 영원한 명제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

Q.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애매하고, 복잡하며 예측 불가능한 것 이라서 학계에서 조차 “행복”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나마 비슷한 의미로는 “쾌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술이나 마약으로부터 기인한 쾌감과, 노력과 시간을 기울여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것, 차 한잔의 여유, 대가가 작곡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 등은 서로 차이가 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업실패, 병마와의 사투 등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요소로 인해 성장했을 때도 쾌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행복은 객관적이고도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주관적 충족, 총체적/ 지속적 만족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절제와 균형의 미, 아리스토 텔레스와 에피쿠로스의 행복]
<쾌락을 동반하지 않는 행복은 없다 – 아리스토 텔레스>

 그는 행복을 어떤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추구해야 할 목표 그 자체로 보았다. 또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는 반드시 쾌락이 동반된다 하였다. 그러나 맹목적인 쾌락의 추구가 아닌 “최대치의 이성으로 덕망을 지니고, 질서있는 쾌락을 추구하라” 하였다.

 
뒤이어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바탕으로 한 행복 윤리를 정립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구성하는 분자들이 해체되며 완전히 무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사후세계에서의 구원을 목적으로 신을 위해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는 종교적 행위가 무의미 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죽음이니, 신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두려움이나 미신에 따른 두려움을 제거함으로써, 아타락시아(Ataraxia), 즉 영혼의 절대적 평온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절제의 윤리학을 설파하며 모든 쾌락을 선택하기 보다는 가장 기본적 필요만을 충족시키라 하였다. 


*


삶의 의미란 단어에는 방향성과 중요성이라는 두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삶의 방향성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과정을 거쳐 목적지에 도달한다. 행복은 그 과정에서 자연히 얻게된다.


목표가 정확하고 간절할수록 그 여정으로부터 얻게되는 행복은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

볼테르는 행복한 멍청이에 대한 단편 동화를 통해 맹목적이고 무지한 쾌락보다는 이성적이고 분별력있는 불행이 더욱 고차원적임을 말해준다.


사고나 지식, 성찰은 곧 인간의 본성이므로, 제한적인 갈망보다는 이성과 진실에 입각한 행복을 추구하는 편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행복해지고 싶어하는가?
행복은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것이며, 행복에의 욕구는 인간행위의 동기가 된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삶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인식을 통해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중요성을 부여해, 그 목표에 도달하기위한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본인이 행복을 우선순위 가치로 놓지 않아, 고의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을 동반하지 않을 때는 결과적으로 행복을 원치 않는 상태가 돼 버린다.
 

3.


*

자유, 사랑, 정의 등 윤리적 가치나 도덕을 추구해야 할 최우선 순위 가치로 놓으면 행복의 추구를 의지적으로 포기할 수도 있다.


칸트는 행복 그 자체가 아닌 도덕의 결과로서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통용되었던 "도덕적이고 선한 자가 천국에서 복을 받는다"는 종교 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


예수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열망했으며, 마태복음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올리브 산에서 체포 당하기 몇 시간 전 극도의 불안감에 떨기도 한다. 그리고 도망쳐 얻을 수 있는 지상에서의 행복 대신 목숨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


소크라테스도 모든 시민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현행법에 따라, 독극물을 받아 마심으로써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관들에게 복종한다. 이처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행복을 포기하는 사례들도 있다. 


*


가장 큰 행복은 개성이다 - 괴테


작가 구스타프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개인의 여랑의 추구 및 실천에는 이기주의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각자의 욕심에 따라, 나름의 욕심대로 오직 자신을 위해 즐긴다. 개개인의 삶의 방식은 개인의 감성과 본성, 재능과 환경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교육과 문화를 통해 필요한 것들을 배우지만, 때로는 획일화된 배움으로 인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이 40대에 접어들면 "개인화 과정"을 통해 타인에게 사랑받거나,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쓰고 있었던 이상적이고도 위선적인 가면을 벗어 던지고, 우리 자신의 개별성과 고유한 감성에 귀기울이려 애쓴다고 설명했다.


괴테 또한 자신만의 감성을 계발하고 개인의 특성, 재능, 취향을 다지는 일들이 외부대상으로부터 발생하는 쾌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


우리의 행복이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달려있다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개인의 감성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다고 했다. 즉, 사회적 성공ㆍ재산ㆍ명성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 기질이 행복에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근본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의견에 동의하나, 개인의 기질은 타고난다 하더라도 후천적 노력에 의해 바꿀 수 있는 것이며, 누구나가 행복해 질 수 있음을 역설했다. 


*

돈?


선진국의 경제적 비약과 삶의 만족도 간 상관관계가 있는가?


미국과 프랑스의 국민 총생산 증대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만족감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개발도상국 국민의 만족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행복은 상대적이라 사회적 비교가 필연적이기 때문에, 부유한 나라의 국민은 상대적인 부를 향유하면서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지역 단위의 비교를 넘어서서, 미디어의 세계화로 인해 비교 대상이 전지구적 차원으로 넓혀졌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작가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돈은 있어야 행복해 지는데 도움이 되지만, 끝없는 물질적 욕망을 제한하고 내면 세계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하라고 제안한다. 돈은 우리네 삶에 있어 편리함을 충족해 주는 것이지,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4.


앞서 저자는 행복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했으며, 행복한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어도 기질을 변화시키면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고대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순간이 영원으로 통함을 강조하며, 기쁨과 행복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다고 했다.


예컨대, 신경증이나 우울증을 앓는 환자들은 지나간 일을 되새김질하는 반추모드로 사고하기 때문에, 현재 순간에 집중하며 사는 방법을 교육함으로써 고무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끊임없는 활동을 강권하는 것은 아니다.


내면세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무위, 침묵, 관조, 독서, 감상, 상상, 명상, 몽상 등 외부 자극으로부터 멀어져 자신을 수양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했다. 


*


정동*ㆍ사유ㆍ믿음의 상관관계: 느낀대로 믿고 생각하는가, 생각하고 믿는대로 느끼는가?
*정서와 감정
 
고대에는 "사유가 정서에 앞선다(붓다)"고 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스피노자 이후 프로이트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정동이 사유의 내용을 결정짓는다 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정동과 사유 사이에 끊임없이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는 "내가 '이것'으로 인해 행복하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만약 나에게 '이것'이 없다면?"이라고 반문함으로써, 현재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주지시키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의 변화로 행복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저자 또한 계속해서 생각을 변화시키라고 한다.


유전자에 의해 전달된 개인의 감수성에 따라 어떤 사람은 낙천적이거나 염세적일 수 있다. 하루 아침에 사고를 변화 시킬 수는 없지만 조금씩 생각을 달리하면 더욱 행복해 질 것이고, 덜 불행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라며. 


*


나이에 따라 느끼는 행복감이 다를까? 


*


우리의 행복이 타인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받을까? 행복은 순전히 이기주이에 의해 지배되는 것 일까?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는 삶의 본질적인 면에서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 행복이 극대화 된다고 믿었다.


저자는 여기에 이타성이라는 개념을 더해, 타인이 가진 고유성과 그로부터 기인한 '다름'이 때로는 강렬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교감해 나가며 행복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대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뼛속까지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보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염세주의적 시선을 드러냈지만, 저자는 인간은 본인의 행복감을 타인과 나누고 싶어하며, 남에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를 완화한다고 했다.


장자크 루소, 마티외 리카르, 불교의 가르침도 인간은 선을 행하며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사랑과 베풂은 삶으로 부터 얻게 된 많은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


모두가 미친 나라에 가면, 정상인을 보고 미친놈이라 한다 했던가?


이와 비슷하게, 저자는 "불행한 세계에서 개인은 행복해 질 수 있는가"라는 화두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고, 행복은 전염성이 있다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우리모두 미디어를 통해 그러한 전염성을 직접 체험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스포츠 선수가 고생 끝에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때, 우리나라 축구팀이 4강에 들었을 때, 혹은 극적인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도 폭발적인 기쁨과 행복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한편, 경쟁자의 실패를 보며 즐거워 하는 이도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쟁심을 독으로 보고 남과 비교하는 대신 모든 종류의 질투심을 극복하여 평정심을 찾으라 했다.


가장 좋은 해독제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함께 기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가르침도 빼놓지 않았다.
 
*


저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되새기며, 개인주의화 된 현대사회에서 집단의 행복 보다는 개인의 행복 - 자기도취적인 개인주의와 소비만능의 이데올로기 - 을 추구하는 행태를 꼬집으며 모든 사람의 행복속에 개인의 이익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행복의 전염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며, 개인의 행복이 곧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행복의 추구는 점차적으로 행복에의 강요로 변질되어 왔다.


시장경제사회로 인해 경쟁적인 소비활동, 외모, 성공에서의 강박 등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은 온전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과정에서 다양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예컨대, 성공을 위해 혹독히 몸을 단련해야 하는 스포츠 선수, 그리고 일도 육아도 잘 해내야 하는 워킹맘, 자녀을이 뒤쳐질 까 퇴근 후에도 자녀 교육을 신경써야 하는 부모 등 스스로를 엄격한 금욕주의의 늪으로 몰아넣는 부류들이 그렇다.


행복과 성공에의 목표치가 지나치게 높은 경우, 엄청난 정신적 고갈을 겪게 되어 만성피로, 불면, 불안, 스트레스 등 여러 형태의 우울증을 겪게 된다.


따라서 점진적으로 목표를 높여가며 차츰 삶을 개선시킴으로써 삶의 만족도를 높여, 먼 옛날의 인류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진보를 거듭할 수 있다.
 
*


행복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인간이 가진 습관성에 따라 점점 무뎌져 권태로 변하게 된다. 불행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행복이나 불행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항상 더 나은것, 더 많은 것을 추구하게 되므로 이는 운명의 개선이라는 순기능을 갖게 된다. 즉 행복에의 욕망이 충족되면 권태로 바뀌고, 권태에의 불만이 결국 인간을 진보시키는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5.


*


현자의 행복은 내재적이다. 그들은 현실, 환경, 세상 등 외부적 요인을 바꾸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 집착, 욕망 등 내면을 다스려 행복을 얻었다.


스토아 학파가 소개한 영적 훈련 중 프로소케(Prosoche), 즉 마음 돌보기 라는 것은 '현재를 충실히 살자'로 요약될 수 있다.


과거나 미래로 도망치지 말고 매순간 집중하라고 말한다. 두려움, 불안, 분노, 슬픔, 욕망 등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바로 현재를 사는 방법이다.


그 중 한 가지 방법을 예를 들어 본다면, 먼저 좋지 않은 사건을 미리 예상해 보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불쾌한 사건을 상상한 다음,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제 그 일들이 일어 났을 때 적용하여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붓다는 삶은 고통이며, 팔정도*를 통해 욕망이나 집착을 없애고, 감각의 쾌락과 고행에의 몰입 등 두가지 극단의 중도에 서서 열반에 이르는 것을 설파했다.


스토아학파와 불교는 공통적으로 개인은 내면적인 노력과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면 행복해 진다고 하였다. 


* 팔정도: 욕망 및 집착 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여덟가지 실천 덕목
- 정  견 : 바르게 보기
- 정  사 : 바르게 생각하기
- 정  어 : 바르게 말하기
- 정  업 : 바르게 행동하기
- 정  명 : 바르게 생활하기
- 정정진: 바르게 정진하기
- 정  념 : 바르게 깨어있기
- 정  정 : 바르게 집중하기


*


몽테뉴는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이었다.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신봉하면서도 본인은 사형을 피해 도망다녔을 것 이라고 했고, 예수처럼 인생과 재산을 바쳐 신에 대한 믿음을 증명할 수도 없었을 거라 했다. 어떻게 죽을것인가(Well-being) 보다는 현재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더욱 큰 가치로 생각했다.


또한 원주민에게 폭력을 행사해 지배하려드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기도 했다. 오히려 신대륙의 야만인들이 문명인들 보다 훨씬 소박하고 자연에 가까운 행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했다. 


*


장자 또한 세상과 사회를 바꾸는 것 보다는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속세에서 떠나 자연과 어우러져 개인의 천성을 살려 완성을 추구하라 했다. 이론적 지식이 아닌 삶과 직접적으로 부딪쳐 얻은 경험을 통해 실천하는 삶을 살라고 했다. 물욕, 성공에의 욕망 등 그릇된 욕심을 버리고 무위의 철학에 따라 온전히 자기 자신에 충만한 사람이 되어라 하였다.


또한 그는 죽음도 인생 리듬 중 하나의 과정이므로, 친지나 주변인의 죽음에도 초연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스피노자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길고 까다로운 인생의 여정에 추진력을 더하는 모터로써 "욕망은 인간의 정수"라고 말했다.


또한 스피노자가 "영원한 지복"이라 칭하는 절대적 기쁨은, 슬픔과 함께 감정을 지닌 모든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인간의 감정은 이 두가지로부터 출발하여 사랑, 진노, 욕망, 야심, 오만, 긍휼, 공포, 증오, 경멸, 너그러움, 희망, 두려움, 과대ㆍ과소 평가, 만족, 분노, 겸손, 회한, 우울 등으로 뻗어 나간다.


아난다마이 마는 진정한 기쁨이란 영적인 삶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했고, 그녀 또한 기쁨을 내뿜는 삶을 살다 갔다. 우주, 신, 그리고 자신이 하나가 되어 완벽히 자아를 깨우칠 때 절대적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본인의 행복론을 확실히 밝혔다.


그는 행복의 형태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시기 또한 불분명해서, 어느 날 문득 우리 곁으로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라 하였다.


내적인 정신 수양을 통해, 삶의 기쁨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우리 안에 깃든 사랑, 기쁨, 평화, 천재성 등과 공명하는 삶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표현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강, 채식주의자 서평 《나무 불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