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몽고반점
소설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남자, 영혜 그리고 인혜.
1. 남자
남자는 야구모자를 써서 듬성한 정수리를 가린다. 영혜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늘어진 뱃살을 손으로 가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단점이나, 처한 상황을 남에게도 투영시키며 자기 위안을 얻는다. 완벽한 사람에게도 뭔가 흠은 있겠지 하며 애써 남의 행복을 못 본 채 한다. 남자 또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동기 M을 보면서 자신과 같이 드러낼 수 없는 욕망과 번민이 있을 것이라 단정 짓는다. 그 보다 조금 더 나온 둥근 배를 보며 적어도 뱃살에 대한 수치심 정도는 있겠지 하며 M의 삶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육체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고민거리들을 투영한 결과다. 즉 남자 또한 젊은 시절을 그리워 하고 나이 들어감에 따른 신체적 변화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르고 탄탄한 근육을 가진 J의 몸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자신은 영혜의 상대로서 부적합한 늘어진 몸선을 가진데 비해 그의 젊음은 아름다웠다. 영혜가 꽃이 페인팅 된 J의 몸을 보며 성욕을 느낀 것을 보고 그와 똑같이 바디페인팅을 해 결국은 영혜를 안는 것에서도 젊음에 대한 질투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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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남자는 나이듦을 두려워 한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그 이미지'를 실현 시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베란다 난간에 기대 선 영혜의 꽃 덮인 몸을 보았을 때, 그리고 수액처럼 말라 붙은 그의 타액과 정액의 흔적이 남아있는 연둣빛 몽고반점을 보았을 때,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겪어 버렸다고, 늙어버렸다고. 지금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낀다.
옛 연인 P와 인혜로는 만족 못했던, 성적이고도 신성한 이미지를 실현시키는 행위가 영혜를 통해 충족이 된 것은 바로 몽고반점 때문이었다. 갓난 아이같은 그 푸른 반점. 늙어가는 자신과 대비되는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그것은 그가 갈망해 마지 않았던 젊음의 상징이자 일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것으로 대변된다.
삼십대 중반 이후 느껴본 적 없는 욕정. 감정 표현이 크지 않고 무미건조한 아내는 단순히 아이로 연결된 동업자의 관계로 보면서, P의 센 성격이나, 처제의 몽고반점 등 생기 있고 젊은 무엇으로부터는 성욕을 느낀다.
남자의 젊음에 대한 갈망의 이유는 P가 페인팅을 해주며 꽃으로 뒤덮인 남자에게 안돼 보인다고 한데서도 드러난다. 예전엔 못느꼈던 불쌍함은 그가 불혹으로 치달아 가면서 갑자기 나타나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늙어가고 시들어 간다. 우리는 탄생하여 죽음으로 달려간다. 이러한 젊음의 상실은 남자에게 권태감을 주었고 노화에 대한 모든 것에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남자는 가장,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위치에도 부담감을 느껴 제대로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매사 차분한 아내를 보며 차라리 화를 내주길 바라는가 하면, 밤늦게까지 옆집에 맡겨놨던 아이를 재워두고 또 다시 작업실로가 처체의 알몸을 탐미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해를 한 영혜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며 삶에 넌더리가 난 것. 본업까지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극심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아마도 영혜의 몽고반점은 그의 정체된 삶에 큰 변화를 줄 정도로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인간성과 도덕, 그리고 선과 악의 경계에서 사춘기 이후 거의 처음 맛보는 일탈을 즐기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2. 영혜
영혜는 이기적이다. 꽃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누구와도 몸을 섞을 준비가 돼 있다. 평소에는 무기력하다가, 고작 몇 분, 꽃 앞에서만 생기를 찾는다. 광합성 후 생겨난 엽록소처럼 그녀의 몸에 남겨진 몽고반점. 영혜는 시퍼런 풀물이 가득한 식물이다. 꽃으로 뒤덮인 자신의 몸, 그리고 타인의 몸에서 욕정을 느끼고, 안정을 찾는다.
'그 얼굴'들이 나오는 기분 나쁜 꿈을 피하려 육식을 버렸던 영혜, 고깃덩어리를 먹어서 그 꿈을 꾼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뱃속부터 올라온 얼굴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실체를 확인하고 나서 이제 더이상 그 꿈들이 무섭지 않다고 한다.
Q. 뱃속부터 올라온 얼굴?
전편에서 나온 꿈의 묘사에서 헛간의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낯설음을 느꼈으며, 그 때 씹어 삼킨 날고기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때문에 고깃덩어리를 먹는 행위 조차 괴로워 진 그녀다. 영혜가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아낸 일상에서의, 그리고 상상에서 나타난 두려움의 대상이, 그날 그날 얼굴을 바꿔 꿈속에 나타난다. 영혜는 고기를 먹어서가 아니라, 그 꿈의 실체는 자신 안에 내재된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더이상 채식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본디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꿈, 상상 이라는 뜻을 가진 Traum에서 나온 것, 트라우마는 결국 정신적 문제이다. 개의 죽음에서 출발한 정신적 충격은,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영혜를 괴롭힌다. 그리고 포식자라는 역할을 맡은 모든 존재들이 그녀의 꿈에 등장해 그녀를 억압하려 한다. '그 이미지'를 실현시킬 사람은 남자 자신 밖에 없는 것 처럼, '그 꿈'의 종결을 결정지을 사람도 영혜 뿐이다. 영혜의 정신적 성장이 곧 포식자로부터 영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Q. 아이스크림- 유제품인데 채식주의자인 영혜가 먹어도 되는지?
영혜의 채식은 상징적이다. 아버지의 폭력, 남편의 무관심, 그리고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살해된 개에 대한 죄책감, 이러한 일련의 이미지가 영혜를 고깃덩어리를 먹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편에서 냉동고의 고기와, 냉장고 안의 우유, 계란을 모두 버려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 영혜는 꿈의 원인이 고깃덩어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 꿈에 나타난 얼굴들이 자신의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이미지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영혜는 자신을 채식주의자라 지칭한 적 없다. 단지 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남들 눈에 채식주의자로 비춰 졌을 뿐이다.
채식주의자라는 말은 타인이 겉으로 드러난-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를 부르는 타이틀으로, 아무도 영혜의 내면-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본질적으로 그녀의 죄책감이나 폭력에 대한 불안을 알려하지 않고 그녀를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채식 주의자라 부르는 부분에서 영혜의 고독과 외로움을 엿볼 수 있다.
Q. 형부는 왜 영혜에게 하필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나?
남자는 영혜에게서 자신에겐 없는 것, 즉 젊음과 생기를 얻고자 한다. 영혜의 시선에서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담지 않은 순수한 눈을 느끼고, 영혜와의 잠자리 후 갓난아이에게서 나는 배냇내를 맡았다. 아이스크림 또한 어린 아이나 젊은 층이 주로 먹는 간식으로, 남자는 영혜를 아직 몽고반점이 남아있는 어린 사람으로 보고 있기에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영혜가 입술에 크림을 묻혀가면서까지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남자의 아이스크림은 녹아 흘러내리고 있다. 무의식 중에 아이스크림은 아이들이 먹는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으며, 처제를 찾아온 목적인 모델이 되어달라는 부탁에만 중점을 두는 모습이다.
3. 인혜
인혜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 바쁜 와중에 엄마로서의 역할에 열심이며, 가게의 오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의 역할에도 최선을 다한다. 날 것으로서의 자신의 감정은 모두 억누르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언니로서 가공된 차분함과 무감각만을 보여준다.
한 데 섞인 남편과 동생을 보고서도, 구급차를 불러 치료를 받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놀라움과 절망감으로 긴장됐으나 애써 침착하려 애쓴다. 그렇기에 혐오와 증오와 분노로 찬 자아를 무감각한 표정으로 일축할 수 있는 것이다.
<몽고반점>에서는 인혜만이 희생자이자 피해자이다. 남편과 동생에 대한 신뢰를 잃은, 두마리의 맹수 앞에 선 유일한 초식 동물이다. 동시에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을 따라 붙는 '그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해 처제를 안은 남편과, 꽃에 매료되어 형부와 관계를 하는 여동생. 그 중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다.
일전에 동박새를 죽인 것 처럼 이번에도 포식자가 된 영혜. 상처 받는 쪽은 인혜 뿐이다. 포식자의 행위 후 젖가슴을 드러내 '나는 포식자가 아니오'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영혜가 나쁜 사람이다.
몽고반점,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도덕 너머의 푸른 신호등
멈출 것인가, 달릴 것인가
<몽고반점>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욕망이었다. 남자는 얼굴없는 나체의 남녀 한쌍의 이미지의 완성본을 보고자 했고, 영혜는 꿈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인혜는 단지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성인의 욕망은 도덕과 양심과 사회적 규율, 그리고 타인의 시선, 지위와 역할 등 여러 제약 요인에 번번히 무릎을 꿇고 만다. 남자가 젊음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어린아이들은 이기적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쟁취해내고 만다. 남자는 아이들에게만 있는 몽고반점을 가진 영혜를 통해 성인이라는 틀을 벗어나려고 했다. 도덕과 양심을 뛰어넘어 처제를 안았다. 영혜 또한 자신을 흥분시키는 꽃으로 페인팅된 육체를 얻어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다. 가장 소박한 꿈을 꿨던 인혜는 하루 아침에 완벽한 가정을 잃었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불신을 갖게 되었다. 항상 착한 사람은 손해를 본다. 원하는 것 앞에 놓인 수많은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몽고반점은 무엇일까?
모든 사회적 관습을 뛰어 넘어서라도 갖고 싶은 것. 보통의 존재라면 마음에만 묻어 놓는 그것. 겉으로 봐선 모르지만 모든 것을 벗고나면 볼 수 있는 숨겨진 욕망.
<몽고반점>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은 현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임을 말해 준다. 마음속에 묻어둔 이미지를 실현했을 때 보통의 경계가 무너지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 모두 하나 쯤 갖고있을 그 몽고반점을 그대로 가리워 두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