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채식주의자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여자의 이야기
단지 특별할 것 없는 여자라는 점에 이끌려 결혼한 남자. 그러나 아내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어느 날 꾼 그 꿈 때문에, 삼십 여년간 고착된 생활 습관을 버리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기행은 이 뿐만이 아니다. 사장 부부의 초대로 부부 동반 모임에 간 아내는 노브라에, 말없이 채소만을 깨작거릴 뿐이다. 간만에 모인 가족 모임에서, 육식을 강요하는 폭력에 대한 항변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병원에 실려가고, 야외에서 옷을 벗고 새까지 잡아 죽인다.
이 여자가 과연 정상인가?
바꿔 생각해 보자. 어떤 것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연작 소설 중 첫 편인 채식주의자, 이 단편은 아직 독자들에게 이렇다 할 충분한 힌트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추상적으로나마 꿈과 과거에 대한 회상을 살짝 들추어 보인다. 아주 작게 읊조린다. 때문에 못듣고 지나쳐 버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
평생을 보통의 존재로 살아왔던 여성이, 어느날 갑자기 괴물처럼 변해 버렸다. 왜 일까. 직간접적으로 그녀가 얽혀있는 폭력의 역사는 유년시절 흰둥이에게 물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니가 감히 나를 물어? 소녀는 자신이 물린 상황에만 이입하여 개의 죽음을 방관했다. 국밥위로 어른거리는 흰둥이의 두 눈에서 채식의 전조 증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채식주의자, 영혜. 조금 더 깊게 들여다 보기
■ 포식자와 희생자 간의 구도
1 개 vs 어린 영혜
2 아버지 vs 개
3 아버지 vs 영혜
4 영혜 vs 영혜
5 영혜 vs 새
영혜는 폭력의 한 가운데 있었다. 개에게 종아리를 물어 뜯기고, 그 개의 마지막을 보았고, 국밥으로 올라온 고깃덩어리를 먹었다. 영혜는 희생자임과 동시에 개를 먹음으로써 본인이 증오해 마지않는 포식자와 한 범주 안에 속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성인으로 자라나면서 간접적 포식자로서 많은 고깃덩어리를 섭취해 왔다. 그 많은 목숨들이 명치 끝에 들러붙어 영혜의 가슴을 옥죄어 온다. 이것은 죄책감이다. 이러한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동박새를 물어 뜯어보는 영혜. 그러나 근원적 해갈 없이 또 한번 옷을 벗어버리고 만다.
■ 대사로 보는 심리
유독 많이 나오는 대사가 있다. 간결하다 못해 찰나와도 같은 그녀의 대사, 영혜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1. 더워서
죄책감으로 답답해진 마음을 나타낸다. 영혜는 유독 브래지어를 갑갑해 한다. 명치 끝에 덩어리진 목숨들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하고자 속옷과 상의를 탈의 하는 행위를 해보지만, 본질적으로 시원해지지는 않는다. 항상 갑갑하고 더부룩하다. 평생을 이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 저는 고기를 먹지 않아요
흰둥이의 죽음에 수수방관했던 유년시절과는 달리 폭력과 권위 앞에서도 자신의 가치관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전무의 부인이 탕평채를 권했을 때, 아버지가 탕수육을 억지로 먹이려고 했을 때, 평소라면 권위에 항복했을 보통 여자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당당히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이다.
3. 꿈을 꿨어
자신의 죄책감을 털어놓고 싶어하고, 타인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SOS. 영혜는 말수가 적다. 그러나 계속해서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누군가 누구를 죽이고 고깃덩어리를 먹고 하는 똑같은 내용의 꿈에 피로감을 느낄 뿐, 왜냐고 궁금해 하지 않는다. 항상 영혜의 대사가 "꿈을 꿨어."로 끝나 버리는 이유다. 꿈을 꿨다는 이 대사는 영혜의 외로움과 죄책감, 그리고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동박새의 죽음, 왜
작은 새를 움켜쥔 오른 손에 놓인 세가지 관점 혹은 가정과 추측
■ 키워드로 보기
새의 죽음은 이 단편의 대미를 장식하는, 매번 피해자의 역할을 맡아왔던 영혜가 직접 포식자가 된 사건이다. 영혜는 동박새를 죽여 오른 손에 움켜쥐고 왼손의 상처를 혀로 핥고 있었다. 마치 개와 같은 습성이다.
무고한 자신을 물어 죽임 당했던 흰둥이의 모습을 모사하며, 자신도 무고한 동박새를 물어뜯었으니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거나 처벌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1. 영혜, 폭력적인 사람이 되다
히스테릭한 아버지 밑에서 불안함과 두려움을 갖고 자란 아이는 아버지와 같이 히스테릭한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 그 아버지 또한 선대의 히스테리를 가진 인물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일가족의 성격은 유전인자가 아닌 공통된 생활 환경이나 양식을 답습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개의 죽음, 그리고 열여덟살이 될 때 까지 가해졌던 체벌. 영혜는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 그러한 환경은 결국 영혜까지 폭력에 물들게 만들었고, 자해를 기폭제로 폭력 성향이 싹트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이 동박새였던 것이다.
2. 영혜, 포식자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이해하려 하다
아무런 의도 없이 덧없는 충동에 의한 오류로 폭력을 행사하는 포식자. 꼭 희생자에 대한 증오가 아니더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포식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 해보려고 무고한 동박새를 죽인 것. 그렇게 해야 흰둥이를 원망했던 자신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흰둥이는 영혜가 미워서 물었던게 아니다. 그걸 알았더라면, 그래서 아버지가 개를 먹도록 놔두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혜는 아버지가 자신을 때린 것 또한 자기를 미워해서가 아니라고, 어쩔 수 없이 오류가 난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폭력의 이유가 자신이 아니라,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려는 태도에서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자신도 무고한 동박새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또한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고기를 섭취하고도 본인이 포식자라는 의식이 없다는 점을 꼬집고, 의도치않게 우리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리는 행위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영혜가 포식자가 된 이유는 그들이 악감정이 없이 충동에 의해서 자신을 괴롭혀 온 것이라고 자기 위안을 하기 위한 것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톡홀롬 증후군에 걸린 피해자 처럼 포식자들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3. 영혜, 포식자가 되어 포식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려 하다
영혜는 폭력의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불안감이 극도로 심해져 더이상 피해자가 되기 싫다는 마음에 연약한 새를 물어 뜯어 자신이 직접 포식자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영혜는 동박새를 물어뜯고 옷을 벗었다. 다시 한 번 명치에 걸린 목숨들에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세번째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은 아무런 해갈 없이 단순히 피해자만 낳고 만 것이나 다름없다.
개, 트라우마가 되다
어린 영혜는 자신을 물었다고 개가 죽기까지 한 것은 너무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항상 품고 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꿈을 꾼 뒤 죄책감까지 더해져 괴로워 하다가,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군림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려들자 자기 존재를 없애버리려 한다.
끽소리 한 번 못낸 개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마지막 발악으로,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항변으로 손목을 그어 기어이 피를 보인다.
매일 누군가가 누군가를 흙삽으로 내려쳐 죽이는 꿈은 개의 죽음을 나타낸다. 말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식탁으로 올라온 고깃덩어리에 대한 죄책감.
어떠한 이유에서든 영혜는 포식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박새를 물어 뜯었다. 그리고 죄책감으로 옷을 벗었다. 나약한 생명은 제 목숨을 바쳐 영혜의 인간성을 지켰다.
혹시 그 어린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흰둥이가 자신을 물고나서 미안함을 느껴 정성껏 상처를 핥아주지 않았을까?
어린 영혜는 감히 자신을 문 개에 화가나 죽음을 방조했다.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흰둥이처럼 자신의 상처를 핥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폭력적인 성인이되어 동박새를 죽였나
포식자의 입장에서 포식행위는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증명하려 했을까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이를 해소하고자 스스로 포식자가 되려한걸까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혜가 가슴을 드러내고 있던 것으로 보아 아마 그것은 그녀가 찾던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폭력으로만 씻어지는 것일까.
동박새를 죽인 것과 자신을 물어뜯은 개의 모사 사이에는 아직 부실한 근거들밖에 없다. 영혜가 더욱더 강해진 죄책감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다음 단편을 통해 알아보아야 겠다.
+
둥근 젖가슴이 상징하는 것:
다른 신체기관과는 달리 비폭력적인 가슴은 영혜가 자신을 포식자들과 구분짓는 경계선이다.
그러나 채식을 하며 둥글었던 가슴이 둔덕해 지고 결국 동박새의 죽음과 맞물려 영혜가 비폭력과 폭력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영혜가 상의를 벗고 있었던 것은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비폭력성을 나타내주는 가슴을 내보이며 일종의 항복을 표시한 것은 아닐까?
자신을 포식자로 보지 말라고.
나는 그들과는 달리 이 젖가슴이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