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상처를 음악에 녹여내다
12개의 측백나무
측백나무. 꽃말은 기도, 견고한 우정. 고흐의 작품에서도 많이 접해볼 수 있는 이 나무의 영어 이름은 사이프러스다.
드보르작은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이었던 조세피나를 사모했지만 실연 당한다. 드보르작의 현악4중주를 위한 12개의 측백나무 시리즈는 그가 실연 당한 이후 지었던 가곡을 20년 후 현악 사중주로 편곡한 것으로 "누구나 가슴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부제를 지니고 있다.
실연 후 작곡했다는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이 음악을 들으면 고독과 쓸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우울한 분위기가 감돈다.
심연에 내려앉은 멜랑꼴리, 우울한 청년의 시
눈 덮인 언덕, 사철 푸르다는 측백나무도 그 푸르름을 잃어버리고 낮은 온도와 강한 바람을 겨우 겨우 이겨 내고 있다. 조심 조심, 아직 눈이 덜 쌓인 가지를 찾아 내려 앉는 눈송이는 자신의 무게를 모른다. 으레 그래왔다는 듯 측백나무는 모든 흰 것의 무게를 이겨내려고 분투한다. 그러나 야속한 눈송이는 멈출 줄 모르고 가지 가지에 똬리를 튼다.
잠깐 불어오는 훈풍에 마음을 놓으려던 측백나무는, 다시 그 온도를 바꾼 찬 바람에 정신을 차린 듯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눈들을 털어 내고 빈 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눈은 다시 그 가지에 내려 앉는다.
4개의 현악기가 자아내는 음울한 노래는 한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그러나 한없이 느리고 부드럽다. 아주 조심스럽고 어딘가 억눌려 있다.
그러다 곡의 후반부 강하게 현을 밀어내는 활들은 히스테릭하고 드라마틱하게 한 방을 터뜨린다. 마무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울하고 나른하다. 마치 맹추위에 익숙해진 마른 겨울나무처럼 말이다.
드보르작, 체코의 낭만파 음악가
드보르작은 원래 도축업 꿈나무였다. 정육점을 경영했던 아버지의 영향 탓이다. 음악가 중 유일하게 도축 자격증을 지녔던 드보르작은 우연히 독일어 선생님인 리만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도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로 음악을 하기에는 재능이 출중했던 드보르작은 본격적으로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게다가 그는 열차 마니아였기 때문에 음악 수업이 없는 날이면 열차를 구경하는 데 전념했다. 그 유명한 신세계 교향곡을 떠올려 보라. 강렬하고 남성스러운 교향악이 열차의 굉음과 열기를 닮은 구석이 있지는 않은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도축업을 포기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드보르작. 처음부터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불안정한 음악가의 수입에도 굳건히 최선을 다한 드보르작은 비올라 연주와 지휘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녔었다. 그리고 창작 활동에도 열심이었는데 이 때, 브람스가 그의 작품을 극찬하면서 둘 사이의 우정이 시작된다.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독자적인 슬라브 양식을 존중해 주었으며, 둘은 콘서트 투어를 같이 다닐 정도로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단단한 관계를 다진다.
드보르작 : 현악 4중주를 위한 12개의 측백나무 7번 마단조 - Berkshire Quartet의 연주로 감상
Dvorak : Twelve Cypresses For String Quartet No.7 in E Minor B.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