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과 니체가 담긴 우울한 감성
스크리아빈. 러시아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5살이 되던 해 부터 피아노를 배워 스무살이 되기 전에 피아노로 러시아를 평정했다. 게다가 이미 이십대 때 연주회 프로그램의 전체를 자신이 작곡한 작품으로 구성했다고 하니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다.
그의 천재성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스크리아빈이 태어난 후 얼마 안 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숙모의 손에 길러졌다고 한다. 어쩌면 스크리아빈의 곡 전반에 스며든 멜랑꼴리는 어머니의 부재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쳤던 스크리아빈은 프레이즈를 연습하다 오른 손을 다치게 된다. 그 후 좌절하지 않고 작곡가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곡가의 반열에 오른 스크리아빈.
스크리아빈은 앞서 폴랑의 곡을 소개하면서 어둡고 무거운 우울함의 지표로 삼았던 라흐마니노프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리그 소나타로 유명한 프로코피예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천재 작곡가이기도 하며, <닥터 지바고>를 쓴 러시아의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이웃이기도 하다.
사족이지만 파스테르나크는 이웃인 스크리아빈에 영향을 받아 피아노를 공부하다가 전향하여 모스크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역시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끼리끼리라는 개념이 통하기는 하나 보다.
쇼팽의 영향을 많이 받은 스크리아빈,
<혁명>을 닮은 에튀드를 쓰다.
스크리아빈은 쇼팽의 영향을 받아 프렐류드, 에튀드, 임프롬프투, 마주르카 등의 피아노 소품을 많이 작곡 하였다. 특히 이번에 소개할 연습곡 12번은 쇼팽의 <혁명>을 모티브로 했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스크리아빈이 초기에 작곡한 소품집들은 쇼팽을 모방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곡은 몰아치는 듯한 왼손의 프레이즈와 함께 웅장하고도 서정적인 오른 손의 멜로디가 더해져 드라마틱한 서사를 그려낸다. 쇼팽의 <혁명>과도 꼭 빼닮은 것 같지만, 스크리아빈만의 신비로운 배음과 화려한 선율은 과연 스크리아빈이라는 찬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스크리아빈의 곡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12개의 연습곡 중 12번, 올림 라단조.
그야말로 광풍이 몰아치듯 청자를 압도하는, 그러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곡이다.
이 곡의 부제로 붙여진 Patetico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1. 감상적인, 정서적인
2. 애처로운,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비창한, 비통한, 슬프고 마음 아픈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곡의 전반적인 느낌은 우울하고 슬프다. 그러나 화려하고 강하다. 또 섬세하고 여리다.
초반부 주제곡이 두번 반복 된다. 그러나 같은 주제곡이라도 강약 세기를 조절하여 그 우울의 깊이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중반부에서 밝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등장하여 곡의 분위기를 전환하기도 하지만, 먼 동이 트기전 가장 어두워진다는 새벽의 어느 순간처럼 한층 짙어진 멜랑꼴리가 다시 찾아온다. 이러한 우울감은 곡의 후반부까지 이어지고, 마무리 직전 그 정점을 찍는다.
니체를 사랑했던 스크리아빈,
위버맨쉬(초인)의 전형을 노래하다.
스크리아빈은 니체의 사상과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니체가 설파한 초인의 개념에 매료된 스크리아빈은 인간은 중간자의 존재로서 운명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해야하며 결국 초인(절대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음악을 초인이 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았다. 창조적 생명력은 초극을 위해 가장 필요한 재능이었고, 스크리아빈은 자신의 창조능력을 통해 정말로 초이니 된 것 일지도 모른다.
니체의 초인사상 이외에도 종교적 체험과 예술적 체험은 일치해야 한다는 신지학에도 영향을 받아 음악은 형식이나 감정 표현 뿐만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일체를 이룰 수 있는 예술적 도구로 보았다.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믿어 그야말로 예술에 몸과 혼을 실어 새로운 화성체계를 만들었고, 이는 20세기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스크리아빈 12개의 연습곡 중 12번 올린 라단조 - Olli Mustonen의 연주로 감상
Scriabin 12 Etudes No.12 in D Sharp Minor - Pateti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