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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y 12. 2018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르포르타주

계급의 피라미드를 허물어라! 디스토피아 탈출기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쪽은 합격자들의 세계다.


마치 <데미안>의 두 세계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바로 내가 몸담은 지금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먼저라던 헤르만 헤세의 그 <데미안> 말이다. 

그 말은 지극히 옳다. 지금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지금 이 세계가 만족스럽지 않기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현재를 진단해야 미래로 갈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세계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서 일부러 지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시험이나 면접에 합격했다면, 합격하기 이전의 지망생이었던 모습 역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두 세계 사이의 순기능과 역기능, 좌절과 성공을 이해하고 나아가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게 된다.

또한 합격과 당선의 세계가 마냥 선망과 기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판타지에 매몰되면 어둡고 더러운 부분까지 미화나 은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격과 탈락의 세계는 서로의 장단점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로 항상 대치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 둘은 너무도 달라서 물과 기름처럼 띠를 두른 채로 섞이지 못하고 평생 평행선상에만 위치해야만 하는 것일까? 

걱정하지 말라. 어떻게든 노력해서 다른 세계로 입성하고 나면 곧 '상반된 것을 하나로 통합시켜 줄' 아브락사스가 나타날 테니까 말이다.


아... 장강명!


전작에서 장강명 작가가 소설을 현실처럼 그려냈다면, 이번에는 사실을 소설처럼 그려낸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모든 작품이 사회적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장강명 작가의 시선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말이다.

<당선, 합격, 계급>에서는 끊임없이 합격과 불합격의 세계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일관되게 합격자들만 우대받는 시대를 비판하는 논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바라 본, 우리 시대의 현실은 '간판으로 계급이 결정되는 우울함'으로 점철돼 있다.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비극을 눈치채지 못하고  스스로 '간판으로 자신의 계급이 결정되어도 괜찮은 사람'이 돼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바로 자신에게 붙여진 계급의 딱지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경쟁을 통해 계급을 얻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합격자가 된 후 불합격자들을 향한 약자 혐오 또한 덤이다.

하지만 보상은 보상이고, 계급은 계급이다. 둘이 한데 묶여 우등과 열등을 가리는 지표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계급화 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멋진 신세계>에서나 가능한 비인간적 계량시스템이라고 본다. 단순히 학벌과 직업, 연봉과 외모가 개인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모든 계급은 기득권이 설치한 덫이다. 계급의 피라미드 상층부에는 오직 그들만을 위한 라운지가 있으며, 그곳은 아무리 들어가려고 노력해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철의 문으로 닫혀져 있는 것이다.

기득권은 선심쓰듯 해마다 두차례만 그 문을 연다. 흡사 젖과 꿀이 흐르고 아름다운 음악이 멈추지 않는다는 에덴의 동산처럼, 아무도 갔다왔다는 사람은 없지만 만인의 꿈이 되어버린 선망의 핫플레이스. 모두가 그곳에 들어가기에 힘쓴다.

그러나 극히 소수만이 철의 문을 통과한다. 이것은 철의 문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모두가 좋은 곳을 꿈꾼다면, 모두가 좋은 곳에서 살 권리가 있어야지 극히 소수만 그 유익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잘못된 시스템이란 말인가.

결국 그 좁은 철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하층부의 서민들만이 죽어난다. 부족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려 경쟁한다. 상층 계급으로의 진입하지 못하더라도, 바닥만은 면하기 위해 자기보다 약하고 못난 사람을 짓밟는 비참한 삶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개인의 노력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급을 나누지 않고 자유경쟁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낫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너나할 것 없이 건강하게 경쟁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활력을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선과 본선, 1차와 2차로 나누어져 제한된 경쟁을 부추기는 행태는 사회의 적폐다. 적은 자리를 제공하는 사회를 향해야 할 불만이 경쟁자들로 그 대상을 바꾸어 분노로 터져나오게 만들기 때문이다.

계급이 없이 노력만으로 보상 받는것이야말로 가장 공정하고 이상적인 사회적 시스템이다. 자격이 되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선되고 합격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나 스스로 계급화된 사회에 동조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스스로의 성과를 위해 노력하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성과를 위한 노력에 대해 특별한 보상을 바란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성취한것이 제한적이고 희소성을 띌 수록 더욱 가치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는 온전히 자신의 성취감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더 노력하고 더 잘해야만 성과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축소시켜 버린다. 이에 대한 부작용은 각종 스트레스로 나타난다.

자신이 노력하며 겪었던 온갖 고난을 타인에게 혹은 사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남들과 차별화된 계급을 얻게되면 자신도 지나쳐 온 지망생의 세계를 무시한다. 그들이 합격과 당선의 세계로 넘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못된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철의 문을 좁혀 버린다. 이렇게 또 다시 새로운 기득권이 탄생하는 것이다.

우선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성취 자체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자신이 갖게될 지위가 아닌, 성취를 이룬 나의 모습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사회의 부와 명성의 분배가 상향평준화 돼야한다. 누구나 꿈꾸고 누구나 도전하고 누구나 누리는 제 3의 세계가 간절해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왜 계급에 열광하는가


당선과 합격은 한국전쟁 이후 절박한 신분상승의 꿈을 표출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주된 목적은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남들과 차별화되는 자격과 권위를 찾는 것, 게다가 부를 축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삶을 염원하고, 그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소박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점차로 기득권 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욕망을 갖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순박한 사람들을 위한 수단이 당선이나 합격밖에 없다는 사회적 시스템에 있다. 수단이 적으니 그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들 역시 적을 수 밖에.

또한 상층부로 가는 사다리가 이다지도 좁은데도 아무런 불평, 불만 없는 사람들 역시 자신 스스로를 계급의 하층민으로 몰아 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소수만이 달디 단 성취감과 보상을 나누어 먹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이에 침묵하는 사람들은 오직 당신만 철의 문 안으로 들여보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기득권의 밀어에 철저히 속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사다리는 많을 수록 좋다. 상향 평준화 된 공동의 삶, 다시 말해 노력한만큼 이루는, 지망생과 합격자들이 마치 아이와 어른처럼 자연적인 수순에 의해 성숙되는 '사다리 많은 삶'은 기득권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지망생과 합격자들, 그리고 사회 공동의 노력으로 부수고 깨야만 하는 힘든 작업이다.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두 세계의 대치나 평행이 아니라 통합과 이해, 그리고 변혁을 이룩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유토피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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