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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Sep 23. 2019

시답지 않은 농담

인간과 가까워 지기

현대인의 특권, 농담과 여유

서비스를 하다 보면 유독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웃음으로 맞이 하면 대개 웃음으로 화답이 돌아오는데, 웃음이 무색할 정도로 무표정하거나 오히려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살갑게 다가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오히려 무표정하고 방어적이고 경계하는 태도가 원시에 가깝다.


집도 절도 없던 시절, 대충 동물 가죽을 둘러 쓴 원시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슴의 뿔을 머리에 차고, 맹수의 얼굴이 그대로 달린 가죽을 둘러쓰고, 화난 표정을 지어 자신이 위험한 상대라는 것을 알리는 수밖에.


나는 웃음을 웃음으로 받아칠 수 없는 그런 사람을 원시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천적이라곤 거의 없어져 버린 현대인들에게 사슴뿔과 곰 가죽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굳이 화난 척하지 않아도 서로의 공간이 유지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자만이 웃음을 얻는다.


웃음이라는 것은 성격이 아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들도 억지로라도 웃는다. 왜냐? 그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웃음이라는 것은 호의요, 배려다. 서로 해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합의다. 때리고 욕해서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보다, 웃음 띈 얼굴 하나로 모든 불필요한 정신적•육체적 폭력을 는 것이 훨씬 고차원적인 게 아닐까?


불신 넘어 서기

한 손님이 와서 체크인을 했다. 주기적으로 호텔에 방문하는 한국인이었는데 한국어를 쓰고 싶지 않은 듯,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에 한 번도 한국어로 받아치지 않는 미스 아메리카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미스 아메리카는 절대 웃음을 보이지 않는 원시인이었다. 사슴뿔과 곰 가죽 대신에 화려한 명품과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녀는 짐짓 화난 얼굴로 자신이 위험한 존재임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2011년도엔 유명세를 타지도 않았던- 아재 개그를 날렸던 게 바로 나였다.


농담으로 장벽 허물기

스파 예약을 하는 도중 성별 체크란에 이른 그녀에게 괜히 말을 붙여 보았다.


"여자는 왜 female이고 남자는 왜 male인 줄 아세요?"

"..."

"여자가 더 철(fe)이 들어서요^^"

"...!"

"^^;"


묵묵히 예약 메모를 남기고 돌아서던 미스 아메리카. 시니어들이 무슨 말 했냐고 와서 물어도 나는 그냥 "nothing"이라고 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농담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뒤로 미스 아메리카가 나에게 목례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배경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또 무슨 이유로 호텔에 수 회 방문을 하는지.


그녀 또한 내가 왜 프런트에서 아재 개그를 날리고 있는 것인지 몰랐을 터, 우리는 원시 시대를 지나 현대로 가는 기차에 함께 오른 것일 뿐.


그냥 좀 웃음을 아끼는 원시인들에게 농담이라는 현대행 익스프레스 티켓을 건네주고, 그것이 찢기고 구겨져 바닥을 나뒹구는 것을 보는 게 내 일인 것이다.


목례로라도 화답을 받는 게 어딘가? 적어도 농담 티켓은 그녀의 명품 가방 한 구석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데에 위안을 얻었다는 말씀.


결국 농담은, 웃음은 인간을 서로 가깝게 만든다. 이제 호텔일도 예전 일이 돼버린 지 오래여서, 실제 사람들보다 문학 속 주인공들을 탐색하는 게 더 익숙하지만, 소설 속에서도 고집 세고 융통성 없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허물려는 시도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아마도 작가들이 소설을 쓰던 당대에도 사슴뿔과 가죽으로 완전 무장한 원시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요새는 마음에 굳은살이 많이 생겨 괜찮지만 예전에는 화난 얼굴, 무표정, 건조한 말투에도 상처를 받았던 유리 가슴이었던 나에게, 그리고 아직도 원시인의 공격에 가슴을 부여잡을 현대인들에게 농담이라는 연고를 발라주고 싶다.


아직도 원시시대에 발 묶인 그들에게도 마음껏 아재 개그를 날리고 싶다. 그게 목례로 돌아오든, 짜증으로 돌아오든, 이미 내 입을 떠난 시답지 않은 농담은 내 소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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