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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Sep 08. 2019

주말 드라마는 암을 좋아한다

암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생일을 하루 앞둔 날, 부고를 들었다.


위암 말기.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봐왔던,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래된 수도꼭지에서는 금방 물이 나오지 않는다.


수도꼭지를 한 참 돌리고 나서야 삐질 삐질 녹물이 흘러나온다.


주말 드라마는 암을 좋아한다

맥락 없이, 느닷없이, 갑자기 내려진 암 선고는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의 눈물샘까지 자아내는 주말 드라마 부동의 단골 소재다.


하나 같이 짠 것처럼 무슨 무슨 암 말기. 그리고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이 빠지면 섭섭할 정도다.


암 선고가 떨어지면, 철없던 막내가 갑자기 효도를 하고, 원수 지간 같았던 가족들이 갑자기 화기애애해진다.


막장 스토리에, 사이다보다 더 시원한 핵폭탄급 대사가 난무하던 그 드라마들은 갑자기 교양 캠페인이라도 된 양 온순하고 착해져 하루아침에 다른 드라마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때, 암 선고를 받은 주인공은 마치 잠이 들 듯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게다가 뻔하디 뻔한 ‘몇 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억지스럽게 웃음 가득한 가족들의 모습을 끝으로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감사했다’는 멘트가 올라간다.


권선징악적 메시지에 빠져 감정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시청자들은 다음 드라마 예고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슬픔을 강요하면서 마음껏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는 야속함이 나를, 그리고 그들을 더욱 공허하게 만든다.


다음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이 암 선고를 받을까? 아마 그러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나는 암이 싫다

말 그대로다. 나는 암이 싫다.


드라마에서 암환자가 나와서 울고불고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열이 오른다.


확률은 나를 피해 갈 것이라는 순진한 소망이 부고로 바뀌었을 때의 그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리라.


나는 암이 싫다. 꼴도 보기 싫다.


왜 그것을 티브이에서까지 봐야 하는가.


그날, 유난히 밝았던 보름달과 무겁고 축축했던 공기, 눅눅한 그 기분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나를 가슴이 쿵쿵 뛰고 열 오르게 해서 싫다.


눈물이 날 것 같고 슬픈 것이 아니라,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변하지 않는 ‘죽음’이란 것이 나를 괴롭게 만든다.


드라마 작가들은 자신이나 자신의 지인이 암 선고를 받고, 고통 속에서 치료를 받고, 그래도 호전이 되지 않아 아무것도 못 먹게 되고, 더 이상 마를 수 없을 만큼 말라 공포감과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그런 상황이, 말 그대로 ‘드라마 속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일까.


확률은 나를 피해 가지 않는다. 확률은 사람을 피해 가지 않는다. 어떤 일도 장담할 수 없다.


드라마 작가들을 싫어하느냐고?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신체화되어 나타날 정도로 괴로운 그 ‘암’이라는 것이 단순히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싫을 뿐이다.


더 싫은 것은?

그 보다 더 싫은 게 무엇인지 아는가?


암환자들과 그 보호자들이 느낄 감정들이다.


암병동에 가면 생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우중충하지 않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그런 분위기에 비해 그들이 겪는 고통이 엄청나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란다.


아픈 와중에 즐거운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정말로 대단하지 않은가.


암병동 사람들도 드라마를 본다. 그들도 예능 프로를 보고, 축구 경기가 하면 축구도 보고, 때 맞춰 뉴스도 본다.


특히나 보호자가 잠시 집으로 돌아가거나 식사를 하러 병동을 떠나면, 그때의 드라마는 환우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런 드라마에 암 환자가 등장한다면? 게다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모두를 슬프게 만들며 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면?


나는 실제로 그런 현장에 있어 봤다.


나는 티브이를 등졌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그랬다.


모두들 뭔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킨 것 마냥, 안절부절못하며 하릴없이 이미 정돈되어 있는 침대를 매만졌다.


병동 안 모두가 그럴 것이다. 죽음을 기대하고 이 고통스러운 치료를 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100프로 살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뭐라도 해보려고,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병원에 온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짜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연기’를 하던- 주인공이 암으로 죽는 장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가까운 미래의 자신, 혹은 남겨진 가족들의 감정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 그것만은 그저 재미로 소비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래서 나는 암이 싫다.


드라마에서 암 선고를 내리는 것이 싫고, 실제 상황도 아닌 것에 감정을 소모하게 만드는 것이 싫다.


주말 드라마는 암을 좋아하지만, 나는 암이 정말로 싫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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