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들은 스마트폰 어플로 예매를 해와 여유있게 대합실로 가는데, 노년층들은 성마르게 목적지를 향해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다.
표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없다면 다음 차편을 기다리며 시간을 버려야한다.
새로운 문명을 습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간을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내 일'이 아니라고 방관해선 안된다. 그게 바로 '내일'이 되어 코 앞에 닥쳐올테니까.
청춘은 단지 수십년 머무는 판타지나 마찬가지다. 뺏길까봐 전전긍긍하고, 미련과 집착으로 애써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긴 싫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나이들어가는게 당연한 일인데, 시대에 뒤쳐지고 손해를 보는게 노인의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이 싫다.
유럽에 가면 문명과 기술이 발달된 선진국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아날로그에 멈춰있는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여전히 키오스크에서 종이 신문을 팔고, 역무원에게 티켓을 끊고, 도어락이 아니라 열쇠로 문을 잠그고 연다.
유명한 브랜드가 아니라도 동네마다 백년은 가뿐하게 넘는 연식을 자랑하는 까페와 베이커리가 있다. 오래된 것은 해를 넘어서 묵고 묵어 '장인정신'이라는 것으로 포장된다.
느리고 답답하다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인간 소외와 세대의 갈등을 경험했다. 조금 느리게 가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노인은 미래다
아이들도 미래고 노인들도 미래다. 누구나 아이로 태어나 노인이 되어가니까. 우리의 미래는 아이보다는 차라리 노인에 가깝다.
너무나 빨리 모든 것이 변해버리는 시대에 '노인'은 뒤쳐지는 사람이 아니라 한 시대가 지나온 이정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는가?
아이들이 '시대'의 미래라면 노인들은 '우리'의 미래다. 노인들이 멈춰선 그 이정표는 곧 우리가 당도하게 될 다음 역이 된다.
노인이 잘 사는 세상이 되면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때 잘 살 수 있다. 노인이 잘 사는 세상인데 하물며 아이들이 살기 안좋을 리가 있나.
노인은 과거에 박제된 화석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조금 오래된 인간일 뿐이다. 이미 우리가 머무는 청춘이라는 터널을 빠져나온, 그저 약해지고 몸이 좀 불편해진 하나의 군상일 뿐이다.
시대와 사회의 편리는 약자에게로 흘러야 한다. 그것이 결국 우리 모두의 긍정적인 미래라 할 수 있다.
논과 밭을 갈아 엎은 산업 혁명은 정보의 파도에 휩쓸려 녹이 슬고 말았다. 이제 우리의 코 앞에 다가온 네 번째 파도는 인간을 노리고 있다. 노인을, 우리를, 뒤이어 우리의 아이들을 휘감을 것이다. 노인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첫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