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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an 02. 2020

옷장 정리

마음 비우는 일

해를 걸러 겨울이 오기 전, 내가 해왔던 의식 아닌 의식이 있다.


바로 헌 옷을 기부하는 일이다.


체형이 변해서, 유행이 지나서, 단순 변심으로... 저마다의 이유를 품에 안은 케케묵은 헌 옷들이 옷장 한 구석, 손 길 닿지 않는 곳에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 들은 거의 새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인의 사랑을 받는 옷들은 헤지고 닳아 버려지고, 주인이 외면한 옷들은 고이 접혀 새 주인을 찾아간다.


결국 내가 사랑했던 옷들도, 그렇지 않은 옷들도 내 손을 떠나가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언젠가는 비워 내야 할 마음과도 같은 것들이다.


올해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옷장 정리가 늦어졌다.  결국 해가 바뀌고 나서야 묵은 옷들을 꺼내 박스에 담았다. 그때의 유행과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어쩐지 완전히 새 것 같지는 않은 옷들이 차곡차곡 개여져 한 박스 안에 담겨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서글퍼진다.


무엇을 위해 모은 것이며,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도 놓지 못했던 것일까?


절대로 다시는 입지 못 할 것임을 알면서도, 고집스레 부여잡고 있었던 오래된 것들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것들이고, 그 '언젠가'는 불시에 찾아온다. 그런 순간들이 있다.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어지는 어느 순간들이 있다. 계획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어느 시점이 어느 순간 불쑥 내 앞으로 다가온다.


그때 나는 느낀다. 이런 순간들은 과거로부터 떠나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고 있다고, 이런 순간의 변화가 나의 과거이자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전의 것을 고집하면 나는 과거의 사람으로 남는다. 조금 아쉽더라도 정리하고, 조금 서운하더라도 떨쳐내고, 조금 아프더라도 털어 내는 것만이 나를 미래로 이끈다.


그런 변화는 한 걸음 바깥에서 보면 지극히 미미한 것들이다. 그러니 내가 너무 변할까 봐 두려워 '마음 비우는 일'에 소홀할 필요도 없다.


올해, 나는 마음을 비워 냈다. 새로운 것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오랜 꿈을, 낡은 옷을, 안 보는 책들을, 서운한 감정들을 그러모아 박스에 담아 두었다. 과거의 것들이 아무리 새된 비명을 질러댈지라도 절대 그 박스를 열어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올해야말로, '옷장 정리'는 제대로 된 의식이 된 것 같다. 다가올 변화가 벌써부터 정겹다. 그 또한 곧 과거가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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