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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Oct 16. 2019

손가락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남 미워할 힘으로 자기를 더 사랑해 주세요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내 개인의 삶에는 악플이 없다.


그러나 내 책에는, 내 글에는 악플이 달린다.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글의 난이도에 대한 불평이나, 내 책에 실린 작품의 장르에 대한 아쉬움, 디자인이나 가격 같은 면에 대한 푸념들이 바로 그것이다.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이해가 안가서다. 출간되지도 않은 책에 대고 실망했으니 살 필요가 없겠다는 말,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진짜 별로라는 말, 제일 충격적이고 모욕적이었던 말은 이런 쓰레기 같은 책은 안 살 것이라는 뾰족한 호언장담.


나는 청소 좋아한다. 분리수거하려고 하루를 사는 사람이다. 네모 반듯하게 상자를 쌓아 올리고 우유팩은 펼쳐 씻어 말려 차곡차곡 쌓고,  플라스틱과 캔, 비닐은 각기 다른 통에 담아서 분리수거함에 차례차례 버리는 것이 즐겁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쓰레기라니....?


한동안 그 리플이 떠올라서 화가 나고 예민해졌다. 곧 잊어버렸지만 가끔씩 그 리플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를, 내 책을 미워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알고 지냈던 사람이 뭔가 속상해서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그런 리플을 썼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잠이 안 오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밤들도 있었다.


물론 그런 리플들은 이렇게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만큼이나 내 책을 사랑해주는 독자분들의 애정 어린 리플들 사이에서 삐죽하게 고개를 내민 못된 글들은 그 어떤 연고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사랑으로도 보듬어줄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는 적어도 그 사람만큼 생각하고 그 사람만큼 느껴보고 여러 번 다시 고쳐보면서 공들이고 시간을 들였으면 한다.


전체를 만드는 사람에게 부분을 지적하며 그 전체를 폄하하지 말았으면 한다. 지적했으면 개선점도 알려주면 좋으련만, 누구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성숙치 못한 나쁜 말만 툭 던져놓고 떠난 그 자리는 누가 다시 채운단 말인가? 그 사람만큼 생각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제발 경솔한 악플은 넣어둬라.


다 만들어진 원고에 몇 줄로 비난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그 누구나 하는 비난에 내 마음은 썩어 문드러지는 줄도 모르고.


저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제는 나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더 보편적인 악플에 대해 이야기해 보련다.


저들은 누구길래 덮어 놓고 남을 때리나?


아무도 모른다.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왜 남을 비난하는 것인지 모를 테지만, 나는 안다. 그 모든 악플들이 열등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에 만족을 못하므로 괜히 남을 깎아내리고, 자신이 향상될 재간이 없으니 남의 노력을 폄하하여 전부 하향 평준화되길 원하는 사람들.


혹은 바깥에서 난데없이 욕먹고 혼이 나서 자신이 느낀 수치심과 모욕감을 남에게도 그대로 전가하려는 사람들.


실 생활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익명이라는 가벼움 뒤에 숨어서 나쁜 말을 하면서 스트레스나 풀자는 그들이 바로 악플을 쓴다.


내가 그들과 대치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나는 전체를 만들고 그들은 부분을 본다는 점.


빨리, 쉽게 자신의 화를 분출하기 위해서 극히 일부분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거나,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쁠 말을 뱉어내고 숨어서 반응을 살핀다.


전체에는 전체로 맞서라. 비겁하게 부스러기만 긁어대지 말고.


"설리"를 아세요?


오픈된 공간에서 질타를 받으면 수치심이 훨씬 크다. 일대일이 아니라 다수가 지켜본다. 타인이 나를 미워하는 광경을 말이다. 해석도 가지가지다. 정신 승리로 밀어 부칠 급이 아니다.


무명의 작가인 나도 이런 혼란과 마주하는 것이 힘든데, 설리는 오죽했으랴. 그 짧은 인생 전체가 반반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반, 미워하는 사람이 반.


젊은 사람들 쓰는 말 중에 "설리"라는 말이 있다. 설레는 리플이란다. 그러나 설레지 않는, 오히려 무섭기까지 한 무기 같은 리플도 많다.


일대 다수로 평가받는 사람들에게는 "설리"보다는 무서운 리플들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일대일의 공간에서는 아무도 모를 상황들이다. 나 역시 학생이나 직장인 일 때는 이런 불특정인으로부터 기분 나쁜 리플을 받을지 전혀 몰랐다.


친구랑 다투거나 직장 상사에게 혼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기분을 상하게 하는 그런 리플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내가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내 기분을 흐리게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틀린 것 말이다.


내 삶의 바운더리 바깥, 어딘가에서 불쑥 날아오는 그 돌멩이는 수는 적어도 백발백중이다. 아주 가슴을 파고든다.


책을 냈으니, 연예인이니, 공인이기 때문에 무조건 감내해야 할 것이 아니다.


혹자는 그런 리플들도 표현의 자유니 침해 말라고 한다. 정당한 비판이나 고품질의 비평은 나도 반긴다. 그러나 이유나 근거 없는 악플은 결사반대다.


자신들은 표현의 자유랍시고 나름대로 당당하겠지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악플로 자신의 스트레스가 해소가 되려나? 남을 무턱대고 비난하여 자신의 품위가 격상되나?


악플이야말로 철저히 자기만을 위한 악취미다. 나름대로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정당화할지도 모르지. 그 귀한 손가락이 남의 귀한 목숨을 죽이는 흉기 인지도 모르고.


악플러들이여, 삶이 지루하고 무료하여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져 있다면, 악플 대신 설리를 달아라.


남 미워할 힘으로 차라리 사랑을 하시라고요.




아름답고 아까운 사람, 설리. 하늘에선 마음고생 없이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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